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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묵상/묵상하는 개미

육아로 지친 어머니들에게

by 점보개미 🐜 2020. 9. 5.

 

 

 

 

 

바울의 삶과 마리아의 삶, 과연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삶인가.

아니, 내 삶은 누구의 삶을 닮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안다.

사명과 삶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 가치는 절대적이라고. 그래서 비교할 수도, 무엇이 우월하다 열등하다 말할 수도 없다고.

그렇게,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진정으로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선 질문에 마리아가 아니라 바울의 삶을 닮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성취가 곧 성공이고 자기 존재 가치의 입증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이런 사회의 흐름에 철저히 편승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첫 아이를 낳고 아이엄마가 되어

내가 가장 처음으로 맞딱뜨려야 했던 것은 바로 이 성취주의였다.

낮에는 30분의 짧은 낮잠을 포함해 하루종일 품에만 있는 아이를 안고서, 밤에는 2시간씩 실핏줄이 터지도록 울어대는 아이를 안고서 수없이 생각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냐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냐고.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그 시간들, 그러나 정작 아이는 예민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들이 내게는 그저 시간낭비 같았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애를 안고 둥기둥기만 하다보면 수없이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밖에서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신대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기들은 목사 안수를 받았다. 어떤 이들은 학업에 있어 다음 과정에 들어섰고, 어떤 이들은 유학길에 올랐다. 사역에서 인정받는 것처럼 보이고 무언가 열매를 내는 듯한 소식들이 들려왔다.

그런 소식들을 들으면 나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모유수유로 가슴이 아파 울고, 밥도 잠도 모자라 지치고 힘들어 버둥대기에 바쁘면서도

패배감과 나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몹쓸 생각은 참 아프게도 나를 찔러댔다.


물론 알았다.

육아가 얼마나 고귀한 사명인지 얼마나 존귀한 일인지.

하나님을 만나면서부터 가정은, 자녀는 내 사명이었고 내 주된 관심사였으니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이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것과도 다른 문제였다.

하루 24시간을, 심지어 밤에 자면서도 엄마를 찾아 우는 아이에게 매달려 사는 삶은 정말, 날것의 치열함, 생존의 문제였다.

그 치열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버티는 것밖에는.

단 하나, ‘이 시간을 하나님이 주셨고 나를 여기 이 모습으로 두셨다’는 사실 하나를 붙잡고 그저 감당해내려 버둥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그 시간들을 버텼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어느새 지나가 버렸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보냈는지 그저 은혜만을 발견하는 시간들로 남았다.


 


 




며칠전 아이들을 재우려고 누워서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여전하구나, 아직도 나를 찾아오는구나, 싶은 내 안에 있는 성취주의에 대한 싸움.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니, 그리고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또 다시 마리아의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바울의 삶의 모양을 쫓으려하는 마음이 드는걸 발견하곤 했다.

 


많은 사람들은 마리아의 삶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혹 기억한다 하더라도 성탄절 즈음, 수태고지 관련된 말씀만 되새길 뿐이다. 그 일화 속에서 우리는 마리아라는 어린 소녀가 했던 믿음의 고백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에 찬사를 보내고 곧 마리아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마리아에게 있어 믿음이란, 수태고지에 대한 대답, 그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의 찬사는 수태고지 그 찰나의 순간에 머물러 있지만, 실제 그녀에게 믿음의 대답은 평생의 삶이었고, 현실 속 치열함의 연속이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지만 참 사람이셨기에 그 출생도 성장도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고집피우며 우는 일은 없었겠지만 ㅎ)

마리아 역시 우리가 겪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진통을 겪어 그녀의 첫 아이를 품에 안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달래고 먹이고 재우며 그렇게 갓난 아이를 키웠을 것이다. 우리처럼 잠이 모자랐을 것이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지쳤을 것이며 기저귀를 갈다 소변세례를 맞곤 했을지도 모른다. 서툰 손으로 정성을 다해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을 테고 첫 걸음마에 기뻐 박수를 쳤을 것이며 병치레를 할 때는 아이보다 자신이 더 아팠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스럽게 자라나는 자신의 첫 아이를 바라보며 마리아는 가슴 벅차 행복해 했을 것이다.

특히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첫 아이, 장자였기 때문에 더욱 특별했을 것이다.

우리가 첫 아이를 나의 분신과 같이 느끼듯이 마리아게도 예수님은 그러한 존재였을 것이다.

첫 아이의 특별함, 처녀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낳아 키운 나의 소중한 아들.

특히 남편 요셉이 일찍 죽었으니 장자인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큰 힘과 의지가 되었을게 분명하다.

그런 아들이 나이 서른이 되어 사역을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그 아들이 귀신이 들렸다 욕을 하고 어미인 마리아에게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여러가지 사회적인, 그리고 물리적인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에게는 눈물과 같은 첫 아들, 그러나 분명히 알기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의 첫 아들, 그가 부르신 길을 가고자 하는데 육신의 어미로서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에서 마리아가 비틀거리는 몸으로 그저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을 뒤쫒아 올라 갔을 뿐이듯이, 실제의 마리아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갓난 아기를 품고 성전에 올라 안나와 시므온에게 들었던 말처럼, 칼과 창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쑤셔대는것과 같은 아픔에도 마리아는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을 지언정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지만 그 전에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몸이 갈갈이 찢기고 못이 박혀 십자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는 그 순간을 온 몸과 온 맘으로 울부짖으면서도 마리아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마리아의 믿음은 수태고지 그 순간이 전부가 아니었다.

믿음의 대답, 그 너머 그녀의 삶이 진정으로 그녀의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낳아 기르던 그 모든 시간이 실제였고 그녀가 겪어야 했던 아픔 역시 실제였다.

그녀의 삶, 연속되는 모든 순간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삶의 ‘실제’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의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믿음의 대답으로 살아낸 한 여인의 삶을 통해서 ‘한 구원자’가 나고 자라신 것이다.



그리고 감히 생각해 보건대, 우리의 삶, 어미로서 우리의 삶 역시 그녀의 삶과 비슷하다 생각한다.

우리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 역시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아이들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우리에게, 그분이 특별한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우리에게 맡기신게 아니던가.

 

그러하기에 우리가 아이들을 양육하는 모든 순간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우는 아이를 어르고, 자지 못하는 아이를 안아 재우고, 육아에 힘들어 눈물 짓는 그 치열한 모든 순간순간들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는 시간들인 것이다. 우리가 무가치하고 능력이 없어 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시간들이 남들에게 뒤쳐지는, 낭비하는 시간들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최선을 다해 길러내고 있는 시간들인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들이여, 슬퍼하지 말자. 우울해하지도 말자.

비록 눈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작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생명을 낳아, 그 아이들을 하나님 앞에서 키워드리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으니.

매일을 치열하게 먹이고 닦이고 뒤치다꺼리하며 한숨짓는 그 시간들을, 부디 한숨으로 흘려보내지 말자.

우리 아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어도, 한 사람을 통해서 그의 일 이루시기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를 향해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니.

그러니 우리, 자책하지 말자.

이 시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예배가 되게 하자.

나를 보며 슬퍼하지 말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우리의 이 모든 시간들을, 하나님은 충성되다 말씀하시며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니.

 


그러니 어머니들이여,

믿음의 눈을 들어 이 고요한 시간 가운데 일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자.

그리고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일을 힘을 다해 감당해가자.

우리의 작은 일을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니, 오늘 하루 우리의 수고는 분명히 그 뜻 안에 열매를 맺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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