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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배달부/나의 인생에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아빠 하나님

by 노목 2020. 11. 29.

하나님을 향유(frui)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종류의 가르침은 배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기복주의를 매우 싫어한다. 나는 그것을 가르쳐 본 적도 없고, 그것을 신앙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하나님은 내 인생에 수 많은 복을 쏟아 부어주셨다. 그렇기에 복에 대해 아예 함구할 수도 없다. 복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비출 때에나 복이다. 나는 나에게 이러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숲을 걸었을 뿐인데, 작은 즐거움을 누렸다. 누군가의 손길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가난했다.

그러나 더 가난하게 된 시절은 내가 신학교에 가기로 결정하고부터였을 것이다.

알콜 중독이었던 무신론자 아버지는 나의 회심을 혐오하셨다. 내가 교회에 가면, 나의 아버지는 보란듯이 술에 취하여 단칸방의 모든 구석을 술냄새로 가득 채워놓으셨다.

아버지가 원하던 대로 나는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대학에 붙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대학이 신학대학이라는 사실에 절망하며 술을 들이키셨다.

어머니의 지원으로 어영부영 한 학기를 마쳤다. 고향에 내려오니 집안은 쑥대밭이었다. 아버지는 치사량에 가까울정도로 술을 드시고는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치매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작은 가게를 살려보시겠다고 전화통을 부여잡고 계시던 어머니는 결국 홧병을 앓고 쓰러지셨다. 빚쟁이들이 찾아오기 전, 우리는 작은 수레를 끌고 도망쳐야만 했다. 나는 이렇게 나의 고향, 연지동을 떠났다.

아버지를 재활병원에 모셨다. 할머니를 지인 어른께 부탁드렸다. 어머니와 나는 장림 언덕받이의 조그마한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살 방도를 모색했다. 만 17세의 어린 나이는 대학에 들어갈 때에는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조그마한 자랑거리였지만, 일을 구하려 하니 오히려 방해거리만 되었다. 여기저기를 다니며 소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생활비로도 턱없이 모자란 금액만을 벌 수 있었기에 늘 돈이 모자랐다.

교회에 가고 싶었다. 기도가 너무 하고싶었다. 한 번만 버스를 타면 교회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버스비 몇백원이 너무 아까웠다. 장림에서 토성동까지, 편도로 세시간을 걸어다녔다.

하루는 너무 추워서 주머니를 뒤지니 300원이 있었다. 집 앞 은행으로 들어가 10원짜리로 바꾸니 한 주먹이 되었다. 그걸 버스 요금통에 처넣고는 맨 뒷자리에 달려가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300원만 넣은것을 걸리면 어떡할까 두려웠다. 그러고 교회에 가서는 펑펑 울며 회개했다.

시간이 지나 날이 더 추워졌다. 교회에 가려 이른 시각에 일어났는데, 도저히 그 날은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에 앉아 중얼거렸다.

“하나님, 저 오늘은 버스 타고 가고 싶어요.”

문 밖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쪽은 걸어가는 길과는 반대쪽이다. 주머니에 딸랑거리는게 없으니 오늘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 날은 버스 정류장에 기웃거려보고 싶었다. 지금부터 걸어가면 세시간이고, 정류장에 들렀다 가면 세시간 오분이다. 정류장에 가봐야지.

버스 정류장이 있는 코너를 지나는데, 세찬 바람 사이로 뭔가가 하나 날라간다. 본능적으로 움켜잡으니 천원이었다. 누군가가 돈을 놓친게 틀림이 없었다. 저 윗층에서 담배피는 사람이 흘렸나? 시장 가시는 저 아주머니가 떨어뜨리셨나? 돈을 찾는 사람이 없으니 주인을 찾아 줄 방도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마침 교회로 가는 버스가 들어오길래, 냉큼 잡아탔다.

처음은 우연인 줄 알았다. 우둔하기 그지 없던 나는 그렇게 몇 주를, ‘우연하게’ 버스를 타고서야 알게되었다.

아. 하나님이 응답하셨구나.

바람에 날리는 종이 한장도 하나님의 섭리였구나.

전날 밤에 교회 형이 찔러주었던 이천원도 섭리였고, 길바닥에서 주운 오백원도 섭리였구나.

선하신 하나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어린 나의 인생에 스스로를 새겨넣기 시작하셨다.

 


 

첫 사역지에서 전도사가 되었다. 2시간이 넘는 거리를 이리저리 환승하며 다녀야 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너무 허기가 져, 한 마을에 내려 중국집에 들어갔다. 자장면 한 그릇을 시키고 걸터앉아 있으니 창문 밖 현수막의 새로 나온 모닝 lpi 광고가 눈에 띈다. 나는 역시 그 날도 중얼거렸다.

“아, 저런 모닝 하나 있으면 사역하러 편하게 갈 텐데.”

놀랍게도 내 두 번째 차는 모닝 lpi가 되었다. 그 현수막에서 나온 것 처럼 까만 색깔의 차였다.

내 세 번째 차도, 나의 안양 사역도, 보배로운 이와의 내 결혼생활도, 모두 그분의 세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오늘도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하나님이 기쁘셨으면, 나중에 이루실 것이다.

그 날에 나는 이 게시물을 기념하며, 다시 한 번 나의 선하신 하나님을 자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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