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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배달부/옛날에 쓴 글들 + 잡동사니

신앙감정론 1부 : Affection의 개념에 관하여

by 노목 2020. 8. 17.

Ⓒ massmoments.org

 

『신앙과 정서 1,

정서의 본질과 신앙에서의 정서의 중요성에 관하여

 

 

1. 들어가는 말

 

격정적인 대 부흥의 시기와 성만찬 논쟁에 의한 해임이라는 인생의 큰 두 사건들을 거치면서, 18세기의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1])는 신자들이 가져야만 하는 참된 믿음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를 원했다. 이러한 목적 아래에서 1746년에 집필된 『신앙과 정서』(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 이후 『정서』라고 언급[2])는 에드워즈의 저작들 중 최대 명저로 꼽히고 있다.

에드워즈는 먼저 그가 생각하는 참된 믿음의 모델에 대한 성경적 그림을 제시함으로 본 저술을 시작한다. 그는 서문을 통해 베드로전서 1 8절의 핍박받던 시기의 초대 교회에 대한 서신을 본문으로 삼아,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기쁨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후로 시작되는 1부를 통하여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 그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개념인 정서(affection)’라는 단어의 뜻과 용법, 위치와 역할에 대하여 한정하는 작업을 한다. 그는 1장을 통해 정서라는 단어의 개념에 대해 언급하며, 기존 철학자들이 지녔던 기능심리학적인 입장에서의 인간 이해와 자신의 이해가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2장에서는 참된 신앙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서가 가지는 위치와 역할에 대하여 밝힌다. 이후로 그는 3장을 통하여 앞에서 제시한 설명들과 성경적인 근거들을 토대로, 정서에 대한 결론적 설명을 제시함으로 1부를 마친다.

 

2. 정서의 개념과 정의 : 1

콘라드 체리의 연구에 의하면, 에드워즈 당시까지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기능심리학에 가까웠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 감정, 의지라는 세 가지의 구별된 다른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는 전통에 기인한다[4]. 그러나 에드워즈는 종래의 이러한 분류와 인간 이해를 거절하며, 인간 영혼의 기능에 대하여 지성과 정서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새로운 입장을 제시한다[5].

전자인 지성(understanding)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용법으로 이를 사용한다. 그에 의하면 지성이란 단순 인식과 사유의 개념을 포괄하는 개념이다(35)[6]. 반면에 후자인 정서(affection)는 감정(emotion)과 유사하나 같지는 않은 개념이다. 정서는 인간의 지성이 인식한 것을 토대로 그것에게 끌리거나, 끌리지 않는 방식(incline)으로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무엇이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정서를 성향(inclination)이라고도 부른다[7].

존 스미스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성향이 인간의 (외면적) 행위와 관련되어 드러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지[8]라고 부른다. 반면에 성향이 지성과만 관계할 때에는 마음(heart)이라고 부른다(35)[9].

이어서 에드워즈는 정서와 격정(passion)을 구분한다. 정서는 의지나 성향이 뚜렷하게 행사되는 것을 의미하며, 선택 작용이 가능하도록 명석한 이해와 충분한 자아 통제력을 동반하는 것[10]을 말한다. 반면에 격정은 지성에 의하여 통제가 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38).

정서는 대상에 대해서 그것을 좋아하는 경향성과 그것을 싫어하는 경향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어떤 정서는 양자의 혼합으로 드러나는 것도 있다(39).

 

3. 참된 신앙과 정서의 관계 : 2

1장에서 에드워즈는 정서(affection)라는 단어의 개념과 용법에 대하여 밝힌 후 그것이 인간 영혼의 기능 중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제시하였다. 그는 다음의 2장을 통하여 이러한 정서들이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어떠한 부분을 점유하는지, 그리고 참된 신앙과 정서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에 대하여 살핀다.

 

1) 영혼의 의지의 행사인 정서

논의에 앞서,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은 반드시 강력하고도 거룩한 정서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참된 거듭남의 열매로서 신앙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결과를 나타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40)[11].

신앙의 주도적이고도 본질적인 좌소는 바로 마음(heart)이다. 정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건전하고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으켜 주시는 방식으로 생겨난다(41). 물론 참된 은혜의 정도가 다양하기에 어떠한 사람들은 그 성향과 의지가 연약할 수 있으나 마음속에 경건의 능력을 가진 자는 누구나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일들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성향과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거룩한 행사는 모든 육체적, 본성적 정서들을 이겨내는 힘과 활력이 있다(42).

 

2) 인간 행동의 원천이 되는 정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정서는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며, 본성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활동적인 존재인 인간의 본성에 지성을 통한 실천을 예비하는 기능이 바로 정서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42-43)

그렇기에 정서는 인생의 모든 일을 추진해나가도록 하는 원천이며 인간은 바로 정서를 통해 생기를 얻어 행동한다. 만약 사랑, 미움, 희망, 두려움, 분노, 열심, 소원등의 정서들을 다 제거하면 세상엔 활동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릴 것이다(43).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이 세상적인 정서이듯이 신앙적인 문제를 위해 활동하도록 하는 근원은 신앙적인 정서이다. 따라서 정서 없이 교리적인 지식이나 사변적인 생각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44).

 

3) 영혼의 관심에 영향을 주는 신앙적 정서

에드워즈는 자기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앎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정서에 의한 영향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통찰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통하여 많은 성경의 메시지들을 듣지만, 그 중에 마음이나 행동에 변화를 받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정서와는 관계되지 않은 단순한 지성적인 앎으로는 마음, 혹은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44-45). 

 

4) 참된 신앙의 한 부분으로 언급되는 정서

에드워즈는 본 장을 통해 성경에서 정서를 참된 신앙과 연관시키는 장면에 대하여 언급한다. 정서는 참된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써,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는 경외함(fear), 소망, 사랑과 미움, 거룩한 소원, 기쁨, 슬픔, 감사, 긍휼, 열심 등이 있다(46).. 

 

 경외함의 정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들등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참된 경건의 큰 부분임을 자주 언급한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두려워)하는 정서를 포함한다(46).

 

 소망의 정서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들에 대한 소망을 두는 것을 참된 신앙의 큰 부분임을 자주 언급한다[12]. 소망은 주 안에 있는 성도들의 특성이다. 신앙적인 두려움과 소망은 성경 곳곳에서 참된 성도의 특성 중 하나로 나타나 있다(47).

 

 사랑과 미움의 정서

성경은 신앙의 매우 큰 부분을 사랑의 정서에 두고 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참된 신앙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 또한 성경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죄를 싫어하는 미움이라는 정서를 꼽는다[13]. 따라서 성도들은 죄에 대한 미움을 통해 자기 신실성의 증거를 나타내야 할 소명이 있다(48).

 

 거룩한 소원의 정서 

성경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거룩한 소원의 정서도 자주 언급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거룩함을 좇아 주리고 목마르며 갈망하는 데서 행사되는 것이다[14]. 그리스도의 산상 설교 초두에서는 거룩한 소원과 갈망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복되게 한다고 명시한다[15]. 거룩한 갈망은 영생의 복락에 참여하는 조건 가운데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49).

 

 거룩한 기쁨의 정서

성경은 거룩한 기쁨을 참된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언급한다. 성경은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거룩한 기쁨을 큰 열심히 나타내고 표현하라고 자주 권면한다[16]. 거룩한 기쁨은 자기의 신실성의 증거이다(50). 

 

 신앙적인 슬픔의 정서

성경은 신앙적인 슬픔, 애통, 마음의 상함 등도 참된 신앙의 큰 부분으로 자주 언급한다[17]. 경건한 슬픔과 마음의 상함은 성도의 독특한 특성 중 큰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특별하게 인정을 받고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속에 드러나는 요소이다[18](50-51). 

 

 감사의 정서

참된 신앙이 나타날 때 크게 드러나는 또 다른 정서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다(51).

 

 긍휼의 정서

성경은 긍휼(또는 불쌍히 여김)을 참된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크고 핵심적인 것으로 자주 언급한다. 따라서 선한 사람들은 이러한 정서의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정서는 의인을 알아보는 기준이 되며[19] 이러한 품격은 주님에 의해서 묘사된 바, 참으로 복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품격들 가운데 하나이다[20].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정서를 율법의 중한 것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다[21](51-52).

 

 열심의 정서

성경은 열심을 참된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정서로 지적한다. 열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자신을 주실 때 크게 염두에 두신 정서이다[22]. 그래서 열심이 부족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책망을 받았다(53).

 

5) 모든 정서들을 함축하는 사랑의 정서

에드워즈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앙중 가장 주된 정서에 대하여 사랑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재정의하신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53)[23]. 바울도 이 요점을 동일한 방식으로 제시하며, 그에 의하면 사랑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것이고, 신앙의 진수와 영혼과 생명의 요소이다. 사랑이 없이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은사, 지식, 신앙고백)이 아무 소용도 쓸모도 없다(54).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영혼의 진지하고 자애로운 성향 전체를 내포하지만 영혼이 예민하고 생동감 있게 행사될 때 나타나는 정서는 다름 아닌, ‘정감이 넘치는 사랑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여러 정서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것들 중에서 제일 되고 가장 중요하며 모든 정서의 근원이다. , 미움, 소원, 희망, 두려움, 기쁨, 슬픔 등 많은 정서가 사랑으로 비롯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애정어리고도 간절하며 열렬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다른 여러 가지 신앙적인 정서들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등의 정서를 일으킨다(55-56).

 

6) 참 신앙적 정서는 거룩한 정서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탁월한 성도들의 신앙은 거룩한 정서들로 이루어져있다. 에드워즈는 본 소제목을 통해서 성경에 나타난 세 명의 탁월한 성도들을 살펴보며 참신앙의 거룩한 정서를 살펴본다.

 

 다윗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시편을 통해 참된 신앙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그의 거룩한 노래들은 경건하고 거룩한 정서들의 표현이다. 이러한 정서의 표현들은 시편이 쓰여진 당대 뿐 아니라 이후 여러 세대 동안 하나님의 교회가 드리는 공적 예배 가운데 사용되어지고 있다(56-57).

 

 바울

하나님께 가장 큰 그릇으로 쓰임 받고 현재까지도 존경을 받는 사도 바울도 거룩한 정서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영광스러운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이 붙어 활력을 얻고 전적으로 사로잡힘을 받았다. 거룩한 정서로 온전히 압도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24]. 이는 그로 하여금 모든 난관과 고난을 헤치고 주님을 섬기는 일을 계속 진행하게 하였다(58).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대한 그의 친밀한 사랑(억누를 수 없이 솟구치는 애정)을 말한다. 바울은 사랑의 심정, 타인을 향한 간절한 관심, 긍휼한 심정, 타인을 향한 염려와 근심,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기 영혼의 큰 갈등, 유대인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에서 나오는 슬픔, 애정 어린 사모 하는 심정, 기쁨에 대해 말한다(59).

바울은 경건한 열심의 정서를 영혼의 승리로, 환란 중의 자랑으로, 소망의 정서로 말하였다. 자기의 상전되신 주님의 영광과 그 목적을 위하여 주님의 교회의 번영에 대해 값진 열심의 정서는 그의 안에서 끊임없는 강력함으로 마음을 불태웠다(59-60).

그의 안에 있는 열심의 정서는 가르치고 권면하며 경고하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며 해산의 수고 등의 부단한 노력을 계속해가도록 그를 강하게 했다. 이러한 정서는 권세들과 더불어 싸우는 일에서도 움직인다. 바울은 눈물이 가득하도록 열심의 정서가 넘친 사람이었다. 이처럼 바울은 신앙이 크게 정서로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여 보이는 사람이다(60).

 

 요한

요한은 누구보다 주님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로 말세에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경륜을 계시 받은 자였다. 그의 모든 서신을 통하여 그가 정말 정감 넘치는 사람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서신은 뜨거운 사랑의 아름답고 거룩한 정서로 구성되어있다(61).

 

7) 모든 정서의 총화이신 그리스도

에드워즈는 본 장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사랑의 정서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하고 애정 어린 마음의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 주셨는데, 이것은 정서의 행사를 통해 많이 드러났다(62).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열의와 그것을 행하는 면에서 가장 뛰어난 모범을 보이셨다. 그리고 그의 이 정서는 큰 투쟁과 갈등과 여러 고뇌에서 승리를 얻게 하는 요인이었다(62).

그리스도의 삶은 애정(affection)으로 가득 차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행사가 지니는 능력이 그러하였기에 그런 행사들은 죽음보다 강했고, 큰 갈등에서도 이기게 하였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죄를 슬퍼하시고, 간절한 소원을 품으시고, 불쌍히 여기심과 긍휼의 정서로 가득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선물로 남겨 마지막 소망과 유언에서 그의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주셨다. 그리고 교회 전체를 위한 애정 어린 중보기도로 모든 말씀을 결론 지으셨다(63-64).

 

8) 하늘에서 완전한 정서를 띄게 되는 신앙

에드워즈는 본 장을 통해, 천국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신앙의 방법에 대해 연역적인 방법으로 논증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하늘의 신앙은 주로 거룩하고도 능력있는 사랑과 기쁨으로 이루어진다. 천국에서의 모습 그대로 우리의 영혼이 어떠한 사랑과 기쁨을 소유하게 될지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 정서는 육이 아니라 영혼에 속하기에 지상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 하늘에 있는 신앙의 많은 부분이 의심할 여지 없이 정서로 구성되어져 있다.

 

9) 정서적 감화와 관련된 신앙의 방편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참된 신앙의 방편으로 지정하신 규례들과 의무들이 정서적 감화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먼저 기도는 기도자가 기도자 자신이 표현하는 것들로 합당하게 감동받으며(to affect) 복락을 받기에 합당하게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67).

예배 때 드리는 외면적 행동은 그것이 자신이나 타인의 마음에 영향을 줄 때에만 가치 있으며, 찬양은 전적으로 신앙적 정서를 자극하고 표현하려는 목적이 있다(67). 성례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생각하게 하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표현함으로 우리의 정서가 감화 받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에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인상 깊게 새기는 것이다(68). 이 때,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새겨지는 것이 사랑과 기쁨의 정서이다(69).

10) 완악한 마음의 원리와 부드러운 마음의 원리

마지막으로 에드워즈는, 성경의 모든 곳에서 참된 신앙, 또는 마음의 거룩의 많은 부분이 마음의 정서에 걸쳐 있으며, 죄의 많은 부분은 마음의 완악함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주장한다(69). 이 완악함은 강퍅함이라고도 표현되며 마음이 굳어 있다고도 표현된다[25]. 즉 완악한 마음이란 도무지 감화 받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 여러 가지 정서들로부터 움직이기 쉽지 않은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반대되는 선한 마음 상태가 바로 부드러운 마음이다(70-74).

 

4. 결론들 : 3

2장을 통해서 정서와 참된 신앙과의 관계를 대략적으로 살핀 에드워즈는, 3장을 통하여 본 명제에서 도출되는 결론 세 가지에 대하여 언급한다.

 

11) 신앙적 정서와 참된 신앙의 관계에 대한 바른 판단

에드워즈는 본 장에서 신앙적 정서를 폄하하는 무리들을 비판한다. 세간은 지난 몇 년간의 부흥 운동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고양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을 보았지만, 그들 중의 모두가 거듭난 삶의 열매를 거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보게 되었다. 이로써 사실상 참된 신앙에 있어서 정서의 위치가 굉장히 낮게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이 에드워즈 당시의 상황이었는데, 에드워즈는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고 나선다(75-76).

앞에서 본 바, 참된 신앙에서 정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또한 정서에는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이 있기에 모든 정서를 거룩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정서적 반응 그 자체를 거절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될 수 없다(77-78).

 

12) 바른 정서를 일으키는 성향이 있는 방편들의 정당성

정서가 참된 신앙에 있어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면, 신자로서 참된 신앙을 얻기 위한 방편, 즉 정서를 일으키는 성향이 강한 방편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이것은 앞서서 에드워즈가 2장의 9번 항목에서 설명한 것들로써, 기도와 말씀, 찬양, 마음을 감동시키는 책 등이 있다(79).

 

13) 신앙에 속한 것들로 감동받지 못함의 그릇됨

본 장에서, 에드워즈는 정서적 반응이 없는 신자들에 대한 비판을 하고 나선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가장 큰 임무는 신앙인데, 이 신앙을 이루는 주된 부분이 정서라면, 사람에게 있어서 정서적 반응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마땅하다(80-81).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연하게도 인간에게 감동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하셨다. 우리에게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덕행과 죽음, 겸손, 인내, 복종, 순종, 사랑, 긍휼등은 이것을 맞이하는 인간에게 내면적, 정서적 반응으로 다가와야 마땅하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이를 통하여 감동을 받아야 하며, 만약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미리 겸비하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82-83).

5. 나가는 말

신앙에 있어서 거룩한 정서의 중요성을 언급하기 위한 에드워즈의 노력은 본 장을 시작함으로 유연하게 시작될 수 있었다. 서문의 설교를 통해서 대략적인 그림을 그린 그는, 1장을 통해서 먼저 정서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였다. 인간을 지성과 정서로 구성되어있다고 구분지은 그는, 정서는 지성이 인식한 것을 토대로 끌리거나, 끌리지 않게 하는 마음의 힘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후로 2장에서 그는 10가지의 항목을 들어 정서와 참된 신앙과의 관계를 설정하였다. 그는 여러 성경의 언급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들어 참된 신앙이 단순히 지성적 앎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 앎을 토대로 반응하는 마음의 성향, 즉 정서적 반응에까지 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마지막으로 3장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신앙에서 정서나 감정적 변화를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무리들과, 정서적 반응을 위한 방편들을 비난하는 이들, 그리고 신앙 생활에 있어서 정서적 반응을 느끼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일침을 가함으로 1부를 마친다.

 


[1]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 10 5, 미국의 코네티컷주 원저 팜스에서 11남매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티모디 에드워즈는 당시 청교도 목회자였으며 어머니인 에스더 스토다드 또한 당대에 유명한 사역자인 솔로몬 스토다드의 딸이었다. 에드워즈의 가정은 에드워즈가 어렸을 때에 사랑을 부어주는 동시에 신앙과 학업의 훈련을 엄격하게 시켰다.

      에드워즈는 1716, 13살의 나이로 예일대학교에 입학하여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1720년에 학사를 마친 후 그는 계속해서 공부하여 1723년에 신학 석사까지 취득하였다. 그는 학업을 마친 후, 여러 교회에서 청빙 제의를 받았지만 아직 더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학교에 더 머무르기 원했다. 때마침 모교에서 강사로 청빙을 받게 되어 21세의 나이에 예일대학의 강사로 2년 동안 있었다.

      이후 그는 1727,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는 노스햄튼 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교회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2년 후에 외조부가 별세하자 26세의 나이에 담임목사가 되어 23년동안 목회를 하였다. 이 기간 동안 노스햄튼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되며, 1740년에 방문한 휫필드 목사와 함께 대각성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성만찬 문제로 인해 교인들과 반목하여 1750년에 노스햄튼 교회를 사임하였다. 이후 그는 스탁브리지의 인디언을 위한 작은 교회에서 사역했으며, 이 교회는 에드워즈에게 최소한의 일을 맡겼기에 그는 이 시기에 더 많은 시간을 연구와 저술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에드워즈는 1757년에 프린스톤대학의 전신인 뉴저지대학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이유로 들어 거절하다 1758 1월에 취임하였으나 2개월이 채 못되어서 천연두 백신의 부작용으로 사망하였다. 노승환,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 2012학년도 백석대학교 철학석사 학위논문, 18-22.에 근거한 요약.

[2] 에드워즈의 Religious Affection은 현재 많은 한국어 번역본이 있다. 정성욱이 번역하여 부흥과개혁사에서 출간된 역본은 『신앙 감정론』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서문강이 번역하여 지평서원에서 출간된 역본은 『신앙과 정서』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샘 스톰즈가 요약하고 장호준이 번역한 역본또한 역시 『신앙 감정론』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즈의 본 저작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affection의 개념은 강웅산 교수님께서 첫 번째 강의에서 말씀하셨듯이,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치환이 불가능한 단어이다. 따라서 본 단어를 무엇으로 번역해서 읽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나중에 토의해보아야 하겠지만, 일단 에드워즈는 affec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inclination(경향성)과 같은 치우침의 개념을 포함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에, 본 조에서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포함되어 있는 정서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며, 이후로 본고에서는 계속해서 affection 정서로 번역하여 설명할 것이다.

[3]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강 역 (서울: 지평서원, 2012)

[4] 콘라드 체리,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주도홍 역 (서울: 이레서원, 2001), 47-9.

[5] 에드워즈는 양자를 사유를 위하여 분류하지만, 종래의 기능심리학적인 입장과 같이 상호간에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거나, 독자적인 기능체계를 갖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양자는 기능적으로 대립되는 구조에 속한 것도 아니다. 양자는 성향이라는 체계 아래에서 상호간에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강 역, 36., 존 스미스 「신앙감정론과 마음의 감각」, 이상현 편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이용중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0), 219.

[6] 에드워즈가 도덕적 선과 악의 차이를 인식하는 기능으로써 지성을 정의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 Jonathan Edwards, WJE 1, Freedom of the will, Ed. Paul Ramse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7), 166.

[7] 에드워즈가 본 장을 시작하면서 던지는 첫 명제는 정서를 영혼의 성향과 의지의 더욱 활발하고도 두드러진 발동(more vigorous and sensible exercises of the inclination and will of the soul)”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여 다음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 덜 활발한 발동은 정서라고 불릴 수 없는가?

     본 질문에 대하여 존 스미스는 여기서의 비교급(more)은 무관심(indifference)과의 반대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즉 정서란 행위자(agent)가 아무런 이끌림도 없는 무관심의 상태에 있지 않고 어떤 쪽으로 끌리고 기울어지는 작용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설명인 것이다. Jonathan Edwards, WJE 2, Religious Affection, Ed. John E. Smith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9), 12.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존 스미스 편집, 정성욱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5), 33)

[8] 에드워즈 시대의 전후로 의지는 기본적으로 선택하는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에드워즈 및 로크,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모두는 이러한 개념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성향이 행위를 유발하는 선택이라는 외면적 차원으로 이해될 때에 그것을 의지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 될 것이다. Jonathan Edwards, Freedom of the will, 137, 171.,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NY: Oxford University Press in US, 1975), 143.

[9]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정성욱 역, 33.

[10]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정성욱 역, 35.

[11]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0:12 ……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6:4,5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12]  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13]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97: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14]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15]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16]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17]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18]  66:2b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19]  37:21b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20]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21]  23:23 너희가 ……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22]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23]  22:37-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4]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25]  3: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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