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배달부/옛날에 쓴 글들 + 잡동사니

조나단 에드워즈와 도덕적 책임 - Freedom of the will 의 아르미니우스주의 반박 논증 연구

by 노목 2020. 8. 17.

Jonathan Edwards Centre at Hungary

 

조나단 에드워즈의 도덕적 책임의 문제에 대한 연구

- 2부, freedom of the will 에 나타난 아르미니우스주의 반박 논증 연구

 

* 아놔, 각주 옮기는 기능이 사라졌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보겠습니다. 일단 각주 없이 올려봅니다. ^^;;

 

 

 

I. 들어가는 말

A. 문제의식

 

성도에게 있어서 인간의 행위는 구원과 관련하여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하는가? 이를테면 자유로운 인간 의지의 발현에 의한 행위라는 측면을 부각시키게 되면, 그 논리적 귀결은 자연스럽게 성도들의 행실을 선한 측면으로 강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 견해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두 가지 개념을 놓치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예정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견해를 취한다면 방금의 견해를 모두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성도의 행위적 측면을 교리적으로 예속시킬 수 있는 근거를 상실해 버린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성도들의 삶에 대한 태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보장되어야 할 필요를 가진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쪽에 선 학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이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믿음을 배제한 모든 종류의 행위의 지위를 상당히 낮추었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쉽게 나태해질 수 있는 신학적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 펠라기우스의 후손들은 자유의지를 강조해 왔다. 이들에게 있어서 개인의 구원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지만, 개개인 각자가 얼마나 노력을 했느냐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이 결정된다. 반면에 이 견해를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의 전능성이 떨어지는 결과와 함께 자력 구원이라는 비성경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본 논문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심과 인간 행위의 도덕적 책임을 동시에 긍정할 수 있는 논리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작업이 가능한 것일까?

 

 

B. 연구 목적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에 대한 교회사적인 흐름을 뒤돌아보면, 중세 이전까지는 확연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의 발현이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위에 있다는 주장이 강력해 보인다. 교부 어거스틴 또한 인간의 의지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통제를 주장함으로 펠라기우스와 그의 일파를 상대하였으며, 칼빈을 위시한 개신교의 종교개혁자들 또한 이러한 맥락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 대한 정죄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시대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할 대신 인간의 선택의 지위를 높이려는 무리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영향을 미쳤던 이러한 사조를 신율법주의(Neonomianism)라고 부른다. 에드워즈의 시대에 다시 이러한 바람이 불게 된 이유에 대해 앨런 구엘조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제창한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과 갈릴레이와 뉴턴의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최선의 설명 방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는 설명을 제시한다. 이에 의하여서 시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보다 가시적인 물리적 원인에 대한 긍정의 분위기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신학의 범위에서도 인간의 행동에 의한 가시적인 원인인 인간의 의지에 대한 신뢰의 주장이 더 우세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으로 칼빈의 대적자였던 아르미니우스들의 후손들은 다시금 신학적인 영향을 펼쳐 나가기 시작하였고 이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던 뉴잉글랜드에까지 급속도로 번지게 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새로운 신학적 사조에 대해 경계하며 반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칭의론』(Justification by Faith Alone, 1738)과 『의지의 자유』(A Careful and Strict Enquiry into the Modern Prevailing Notions of that Freedom of the Will, 1754), 『원죄론』(The Great Christian Doctrine of Original Sin Defended, 1758)등의 저술을 출판하였다. 에드워즈는 청교도의 노선에 서있으며 칼빈주의적인 전통을 가진 학자로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통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또한 당시에 신율법주의와 정 반대의 논리적 극단에 서 있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반율법주의(Calvinistic antinomianism)라 칭한다. 이들은 칼빈의 사후에 칼빈의 예정론의 논의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인간의 모든 도덕적 책임을 약화시키거나 아예 부정해버리는 특성을 가진다.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문제는 모두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기 이전에 정해놓으신 것이다. 구원에 있어 모든 인간의 행위는 필요치 않으며, 심지어 구원을 위해서 가져야 할 ‘믿음’조차 인간의 행위로 여김으로 믿음에 대한 고백을 불필요하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사조 또한 광신주의라고 보며 이단으로서 심각하게 경계하였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이들의 심각성을 깨닫고 경계하기 시작하였고, 그렇기에 에드워즈는 따로 반율법주의만을 반박하기 위하여 책을 저술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그의 후기 저술들의 곳곳에서 반율법주의를 주의하는 어조를 보였으며, 특별히 『의지의 자유』에서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대적 의견을 상정해놓고 논의를 계속하는데 이 때 반율법주의적 반론들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전체적인 본 논문의 큰 틀은 이 둘 간의 균형에 서 있으며, 극단으로 가지 않고서도 논리적인 일관성을 지니는 설명방식을 고수한다고 보여지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채택하여, 과연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가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고 모두 보장되도록 할 수 있는 주장이 가능한지에 대하여 살펴보는 구도를 가진다. 에드워즈가 밝혔다시피 『의지의 자유』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반대하기 위하여서 지어진 책이다. 따라서 본서에서 신율법주의에 대한 에드워즈의 반대를 찾는 일은 쉬운 작업으로 보이며, 이에 대한 연구도 찾아볼 수 있는 편이다. 하지만 본서에서 에드워즈의 반율법주의에 대한 반대적인 측면과 논리적 정합성을 찾는 일은 꽤나 어려운 작업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에드워즈는 반율법주의를 반대할 목적으로 본서를 집필하지도 않았거니와, 자신의 의견에 대한 반대적 입장으로서의 반율법주의에 대한 대답은 본서의 곳곳에 산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의 세부적인 목표는 에드워즈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의 중요성을 주장하는지를 밝히는 데에 둔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떤 개념을 사용하여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무력화시키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것이 이번에 발표하게 된 본 논문의 목적이며 이것은 중간 세미나에서 발표한 「신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역사적 고찰」에 이어 전체적인 논문에서 2부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C. 연구방법과 한계

 

본 논문은 에드워즈의 저작들 중 먼저 『의지의 자유』에 드러난 에드워즈의 논증방식을 탐구함으로써 에드워즈가 신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모두 반박한 설명방식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에드워즈의 저작들을 모두 석사과정 중에서 연구하기는 너무 방대하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또한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자체가 충분히 집중해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아르미니우스적 신율법주의를 부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지의 자유』를 저술하였지만, 앞에서 언급했던것과 같이 반율법주의에 대한 반박의 요소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을 연구한다는 것은 신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에 대한 부정과 동시에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에드워즈의 논증구조를 연구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에드워즈가 『의지의 자유』를 통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반박하는 방법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의지개념과 자유개념에 대한 반박이라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의 2장에서는 에드워즈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의지개념을 어떻게 반박하는지에 대해서 살필 것이며, 3장에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유개념에 대한 반박을 살필 것이다.

본 연구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본 연구에 실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은 모두 에드워즈의 논의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필자는 필자의 학문의 깊이가 얕고 시간이 부족했다는 변명을 듦으로 에드워즈가 『의지의 자유』에서 주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직접 저술한 서적을 참고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에 관련한 2차 문헌들은 간략하게 참조하였으며, 대부분의 문헌들이 비슷한 논조를 띄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본 논문은 에드워즈가 혹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와 같은 오류를 범했을 때에 그것을 확인하지 못할 수 있다는 단점을 안고 진행하게 되었다. 이후에 이러한 부분들에 대하여 보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남겨두고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II. 자기 결정능력을 지닌 의지의 개념에 대한 반박

A. 당시의 일반적인 ‘의지’의 개념

 

의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에드워즈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지의 개념에 대해서 “지성이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의지란 선택과 동의어이다. 이것을 더욱 간명하게 하기 위해서 에드워즈는 의지를 “어떤 것을 선택하거나 거절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본서에서 에드워즈는 일반적인 정의를 내리기 위하여서 로크의 개념을 많이 차용하였지만, 또한 그것을 비판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데이빗 로렌스는 에드워즈의 기본 개념들이 그가 학부시절 읽었던 로크의 『인간 오성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 의지라는 행위 자체는 무언가를 인식하거나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로크의 정의에 따라 그는 의지를 “지성이 이미 인식한 것에 대하여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로크는 의지를 좋아함(preferring)이나 욕망(desire)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겼다. 이를 좇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도 의지와 좋아함, 욕망을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로크와 같이 의지와 좋아함, 욕망을 구분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의지와 욕망은 “행위자의 어떠한 것에 대한 선택과 거절의 작업”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그는 ‘무의식적으로 걷고 있는 행위조차’ 선택이라는 측면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의지적인 행위’라고 정의한다.

 

 

B.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의지개념

 

위의 일반적인 개념에 동의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도 의지를 선택이라고 본다. 이는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동의한 바 있으며, 에드워즈의 언급대로 당시의 ‘일반적인’ 개념이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의지를 “어떠한 행위를 결정짓고 선택하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의 준거점은 행위자의 의지의 중요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의지 자체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을 지닌다고 주장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의지가 그 자체에 대해 어떤 주권을 행사함으로써 어떤 행동이나 선택을 결정하거나 초래한다고 말했으며, 또한 의지는 그 자체로 이미 행위자이다. 왜냐하면 의지 그 자체와 행위자가 구별된다면, 행위자의 행위의 주권성은 행위자와 구별된 의지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지는 선행하는 충동이나 욕구에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런 충동이나 욕구와 반대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독립된 힘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의지는 결정의 순간보다 앞서 존재하는 무엇과도 아무런 필연 관계가 없다. 그렇기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의지의 원인을 조성하지 않았으며, 의지의 행위는 항상 자연 발생적이며 불가사의하게 일어난다.

 

 

C. 에드워즈의 의지 개념

1.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에드워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의지 개념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언급한 뒤 2장의 1절에서 먼저 그것이 순환적 논증이라는 지적을 한다.

 

만약 의지가 의지 그 자체의 자유로운 행동을 모두 결정할 수 있다면, 영혼은 선택하는 힘의 행동을 수반하는 의지의 모든 자유로운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의지가 의지를 결정한다는 것은 선택이 선택을 결정하거나 지시하는 것이다. ……. 이러한 원리에서 의지는 결국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일반적인 개념에서 의지는 선택의 작용이다. 이러한 선택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다른 선택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의지는 다른 의지를 낳음으로 순환적이다. 특별히 에드워즈가 이 순환적 논증에서 문제로 지적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의지 스스로가 자신의 선택을 결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그 선택을 결정하게끔 만드는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유로운 의지는 선행하는 다른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을 계속하면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유로운 의지를 발생시킨 최초의 의지를 상정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의지가 지금 무엇을 선택한다는 작용은, 다시 말하자면 의지가 이것을 선택하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 선택을 있게끔 작용하는 의지의 선택이 의지가 선택하기 이전에 존재했음을 전제하게끔 만든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논리적인 선행적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두 가지의 귀결에 이를 수 있다. 첫 번째는 의지를 선택하게 하는 선행적 의지라는 꼬리물기식 구조가 무한히 반복되는 모델을 상정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의지의 선택을 있게끔 촉발한 최초의 원인을 상정하는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따르면, 의지는 자생적이며 자기원인적인 것이기에 의지의 원인, 더 나아가 최초의 원인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자의 모델을 상정하게 되면 논리적인 오류에 빠진다. 이런 방식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몰아붙인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제외한 어떠한 창조물도 원인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불완전하며 제한적인 모든 존재(imperfect and finite beings)들은 완전한 존재에게 존재를 의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지도 창조물이라면, 원인이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2. 의지와 행위자의 구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모델에 의하면 의지는 그 자체로 선택하는 힘을 가진 것이며, 의지의 행위자는 의지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의지와 행위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의지는 행위자와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지 그 자신은 의지를 지닌 행위자가 아니다. 선택하는 힘은 선택하는 힘을 지닌 그 자신이 아니다. ……. 이것은 새의 날 수 있는 능력이 ‘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듯, ‘행위자’를 자유롭게 하는 속성이다. 즉 속성의 속성이 아니며 행위자의 속성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행위자와 의지를 구분시키지 않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이유는,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힘이 행위자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행위자와 분리된 어떠한 것에 부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의지’를 행위자와는 구별되었지만, 행위자가 가진 속성이라고 주장하며 행위자에게 예속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것만을 보았을 때,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행위자와 의지를 구별된 개념으로 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지는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행위자에게 의지가 예속된 개념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건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입장을 택했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행위자 자신인 의지가 스스로 발생되(하)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힘’이기 때문에 의지자는 단독적으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인간의 의지의 측면에 많은 힘을 실어주는 주장이 될 수 있어 보인다. 또한 다른 이유로는, 그것의 개념적 불가분성도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행위자는 그 자신이 “행위자로서” 존속하기 위해 의지와는 불가분의 관계임에는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행위자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도 이 둘을 구분하지만 불가분의 관계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스스로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점으로 남아있다.

 

 

3. 의지의 원인에 대하여

 

행위자와 의지를 분리시킨 에드워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원인이 없는 사건은 없다’는 전제를 다시금 들여온다.

 

의지의 정의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결과로서 작용하기 위하여 원인을 먼저 선정해야만 마땅하다.

 

에드워즈는 의지의 원인은 그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 의지 안에 포함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언급한 이후에, 의지의 원인에 대해서 ‘동기(motives)’라고 밝히고 있다.

 

의지를 정의내리기 위해서 의지의 원인을 밝힌다는 사실은 나의 목적과 굉장히 부합되어 보인다. 동기는 가장 인간의 지성 안에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써, 가장 강력하게 의지를 결정한다.

 

에드워즈는 동기에 대하여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거나 받아들인 것을 선택이 되게끔 자극시키며, 움직이며, 초대하는 역할을 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단순한 동기와 복합적인 동기로 구분하며, 또한 강한 동기와 약한 동기로 나눈다. 단순함과 복합적임의 구분은 에드워즈의 맥락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의 중요성은, 그것이 가진 ‘힘’에 있다.

에드워즈가 행위자 안에 존재하는 동기를 단순한 동기와 복합적인 동기로 구분하는 이유는 행위자 안에 여러 가지 동기들이 혼재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행위에 대한 하나의 동기가 존재할 수 있고, 여러 가지의 동기가 존재할 수도 있다. 이 때 여러 가지의 동기는 복합적으로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행위를 유발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 복합적 동기이다. 또한 반대로 여러 가지의 동기가 각기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의지의 작용은 가장 강력한(strongest) 동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런 맥락에서 에드워즈는 “의지를 발생시키는 모든 동기는 가장 강력하다”고 말한다.

앞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의지 자체가 행위자와 구분되지 않으며, 의지를 행사하기 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의지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한 단순한 모델이자 행위자가 행위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전의 의지를 요청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모델이다. 이에 반해 에드워즈의 의지 메커니즘은 행위자 안에 의지와 그것의 원동력이 되는 동기가 늘 존재하는 다이나믹한 모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에드워즈의 개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기의 기원에 있다. 에드워즈의 ‘의지를 발생시키는 동기’는 누가 촉발시킨 것일까? 이는 에드워즈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유에 대한 개념을 반박하는 논증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III. 무관심(indifference)으로서의 자유 개념에 대한 반박

A. 당시의 일반적인 ‘자유’의 개념

 

에드워즈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자유의 개념에 대해 “힘이자 기회, 혹은 좋은 것으로써,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만약 어떤 방해에 의해서 행위자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행위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상황은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이러한 자유개념은 선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행위자가 어떠한 선택을 하는 것을 제한하는 어떠한 것도 없을 때에 그 행위자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를 긍정하며, 행위자가 행위를 위한 모든 선택적 가능성에 있어서 동등한 정도의 자유로움을 지녔을 때에 행위자를 자유롭다고 여긴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행위자는 ‘반드시’ 행위를 위한 모든 선택적 가능성에 있어서 동등한 정도의 자유로움을 지닐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로써 그는 앞 단락에서 설명한 자유의 개념을 부정한다.

 

 

B.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자유개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자유개념은 흔히 ‘무관심으로서의 자유 개념’이란 말로 소개되곤 한다. 여기서 무관심이라고 번역된 indifference는 사실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선택에 있어서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앞의 논의에서 전자에 해당한다. 에드워즈는 본서에서의 이 개념을 대부분 아이작 와츠에게서 얻어오고 있다. 에드워즈가 와츠의 글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며 문제 삼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의지는 어떠한 현 상황의 불편함이나, 혹은 명백하게 보여지는 좋음이나, 지성이 이해한 마지막의 것이나, 그 밖의 어떠한 다른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영혼이자 의지 그 자체의 절대적인 자결력에 의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어떠한 제한도 없다. 나는 지금 고개를 북쪽이든지 남쪽이든지 자유롭게 돌릴 수 있으며 손가락을 놀림에도 어떠한 제한이 없다. 이것은 어떠한 외부의 영향에도 제한받지 않는 완벽한 의지의 발현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의지의 발현에 있어 동기나 선호의 근거란 찾아볼 수 없다.

 

샘 스톰스는 와츠의 의지 발현 메커니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먼저 인간의 지성은 여러 선택지를 인식하는 작업을 한다. 이 때 지성은 이 선택지들에 대해 선호의 작업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인간의 욕구나 필요 또한 이 선택지를 인식하는 작업과 전혀 상관없게 여긴다. 다음으로 의지는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동등된 것으로 인식한 두 가지 이상의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이 때 인간 영혼 그 자체인 의지는 선택의 대상 중에 어떤 것에 대해서도 완벽히 공평하게, 그리고 스스로 결정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러한 논증을 통해 인간의 모든 부분을 통치하기에 모든 책임 또한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의지를 상정하고자 했다. 이를 통하여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무고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목적을 지닌다. 하지만 이 모델의 하나님은 전선하지만, 결코 전능하지는 않게 되었다.

 

 

C. 에드워즈의 자유개념

1.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자유개념의 모순점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무관심 개념에 대해 에드워즈는 일반적인 선택의 개념에서부터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 자의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여러 선택지들 중 하나에 대한 좋아함의 표현이다. 내가 A와 B중 A를 선택한다는 것은 A가 B보다 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리 양보하여서, 선택의 행위 중 그 행위가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좋아함에 대한 완벽한 평형상태에 있을 수는 있다고 하여도, 행위자가 그것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그 평형상태가 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무관심으로서의 자유 개념은 그 자체로 모순에 빠지고 만다.

이에 대해 스톰스는 에드워즈의 이러한 양보마저도 못마땅하게 여기며, 아르미니우스의 무관심 개념은 그들이 그토록 옹호하려고 했던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오히려 약화시킨다고 비난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자선과 인색함을 똑같이 바람직하게 여기거나 더 정확히 말해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선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인색함보다 자선을 택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칭찬할 수 있겠는가? …. 만일 그 사람에게 자비로움을 선호하는 성향이 전혀 없다면, 그리고 그가 자선행위를 인색한 행위보다 더 바람직하게 보지 않는다면 그의 자선 행위는 칭찬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선택이 좋음의 표현, 즉 선호와 관련된다는 에드워즈의 논의는 비단 일반적인 선택 개념의 논리적 전개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다. 이것은 에드워즈가 앞에서 언급한 의지의 원인인 동기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대답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2. 동기의 발생 원인

 

앞서 언급했듯이 에드워즈는 행위자 안에 행위에게 영향을 미치는 여러 동기들이 혼재해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단순하거나 복합적으로 존재하는데, 이것들 중에 행위자의 영혼이 느끼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동기에 의해 의지는 움직이게 된다. 여기서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동기는 앞서 언급한 가장 강력한 동기와 동일하다.

 

우리의 논의에서 지성적이고 자의적인 행위자의 안에서 동기의 영향이 의지나 선택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그것(동기)이 먼저 좋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영혼이 어떤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끌림이나 경향성이 작용해야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논의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영혼이 느끼기에 ‘좋은’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본 논의와 관련된 구엘조의 논문을 번역한 이용중은 이 부분에 대하여 ‘선한 것’, 혹은 ‘최고의 선’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 번역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선함’이라는 용어는 어떠한 하나의 기준에 부합됨에 대한 개념인데 반해 에드워즈는 본 맥락에서 절대적인 선한 기준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영혼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 무엇인지 두 가지의 단계로 설명한다. 위의 인용구 이후로 에드워즈는 자신의 맥락에서 좋은 것은 ‘그럼직함(agreeable)’의 용법으로 사용했다고 밝힌다. 여기서 그럼직함은 외부의 절대적인 권위에 의존하지 않으며, 행위자가 판단하기에 좋아 보이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에 여기서의 ‘좋음’이란 철저하게 행위자의 상태에 의존한다.

 

행위자의 마음의 본성적인 특성이든지, 혹은 교육이나 실례, 관습이나 그 외의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후천적으로 배웠든지, 아니면 선택할 당시의 특별한 어떤 상황의 영향등의 조건들로 형성되는 특별한 마음의 기질에 의해서 행위자의 마음은 선택의 대상을 그럼직하거나 그럼직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 ……. 이러한 점에서 각기 다른 선택의 대상들은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럼직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혹은 같은 사람의 다른 상태에 따라서도 그럼직하게 여겨지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다시 정리해 보면, 행위자의 의지가 발현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는 행위자의 마음이 판단하기에 가장 ‘좋은’, 즉 ‘그럼직한 것’인데, 이것은 행위자가 선택 당시에 가진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좋을 수도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때, 마음의 상태를 에드워즈는 특별한 기질(the particular temper)이라고 말하며, 이어진 문단에서 그것을 마음의 경향성(inclination)이라고 언급한다. 결과적으로 행위자의 의지는 행위자가 가진 경향성에 의해서 부여된, ‘좋음’이라는 동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3.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한 행위자

 

에드워즈가 그의 저술들의 도처에서 주되게 사용하는 경향성의 개념에 대한 이상현의 연구는 에드워즈가 경향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린 것을 언급한다.

 

모든 경향성들은 어떤 경우에 어떠한 행동이 실천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하나의 법칙이다.

 

에드워즈가 이러한 개념을 갖게 된 이유를 밝히기 위해 이상현은 에드워즈의 경향성 개념의 역사적 배경을 살피는 연구를 하였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에드워즈의 경향성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hexis의 개념과 아퀴나스의 habitus의 개념에서 얻은 아이디어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이상현은 에드워즈의 경향성의 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능동적인 잠재태”라는 개념과 아퀴나스의 “습관과 그것이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을 포함하며, 이것들과 더불어 당시의 시대상이 요구했던 더 포괄적인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하며 그의 논의를 이어 나간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에드워즈의 ‘경향성’ 개념이 하나의 법칙으로서 작용할 때에, 만약 악한 행동을 ‘그럼직한 것’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그런 경향성을 지닌 것이며, 그런 경향성이 생겨난 원인은 그 사람의 이전의 의지적 행위에 따른 습관으로 생겨난 것인가? 반대로, 선한 행동만을 ‘그럼직한 것’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러한 경향성을 지니게 되었는가? 에드워즈의 경향성에 대한 모델이 후천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순간 에드워즈의 모든 논증 또한 순환적 모순에 빠져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아예 경향성이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주장을 하는 순간 하나님은 악의 원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본 논의에서의 논점은 경향성의 기원이 후천적인 인간의 습관에 의한 것인지, 혹은 선천적인 주어짐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다.

이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경향성의 원인에 대해 어떤 맥락에서는 선천적인 것으로, 어떤 맥락에서는 후천적인 것으로 본다. 이것은 에드워즈가 경향성의 원인이 선천성과 후천성 모두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보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상현도 여기에 동의한다.

 

에드워즈가 경향성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는 맥락은 먼저 어거스틴과 칼빈의 연장선상에서 원죄론을 인정한다는 것에 있다. 에드워즈는 1758년, 존 테일러의 『원죄론』(Scripture-doctrine of original sin)에 반대할 목적으로 『원죄론』(he Great Christian Doctrine of Original Sin Defended)을 저술하였다. 테일러는 아르미니우스적 인간 본성의 순수성을 확증하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칼빈주의적 원죄론을 주장하는 에드워즈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본서에서도 에드워즈는 이러한 입장을 잠시 언급하는데, 원죄에 의하여서 인간은 죄로 가득한 경향성을 가진 채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로 가득한 경향성을 가진 행위자는 자연스럽게 죄를 ‘그럼직한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동기의 원인인 경향성이 죄로 쏠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자에게 있어서 의지 자체는 아무런 제한이 없으며 자유로운 상태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지를 행할 수 있는 여러 동기들 중에 죄로 물든 경향성에 의한 동기가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발휘하였고, 행위자의 의지는 그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본 논의의 맥락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옹호하는 인간 의지의 온전성은 사실 제한된 것이며, 이것이 인간이 처한 현 상황에서의 자유로운 상태라는 점을 말하는 것에 있다.

 

 


 

IV. 나가는 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행위자의 근본적 책임을 말하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 구조로 발전되기 위해서 낙관적인 인간이해를 근저에 둔다. 아르미니우스는 의지와 행위자를 구별하지 않으며, 행위자인 의지는 자체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무제한적으로 선택지를 선택한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의지와 행위자를 구별한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행위자의 의지의 원인은 동기이며 이 동기는 단순하거나 복합적으로 행위자 안에 산재해 있다. 이 동기들 중 행위자가 느끼기에 가장 그럼직한 것, 좋아 보이는 것이 가장 강력하게 의지를 결정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그럼직한 것은, 인간 안에 선천적이든지 후천적이든지 어떠한 방향으로 자리잡은 경향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경향성이 죄에 물들어 있으면, 죄와 관련된 동기가 그럼직하게 여겨질 것이며, 경향성이 선에 기대어 있으면, 선과 관련된 동기가 그럼직하게 여겨질 것이다. 행위자는 이것을 토대로 선택하게 된다.

다음으로 에드워즈의 반율법주의 반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논점이 되는 것은 동기의 원인인 행위자의 경향성이 어떻게 형성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첫 번째로 원죄의 유입에 대한 에드워즈의 입장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에드워즈는 『의지의 자유』에서는 하나님의 허용이란 진술을 하며 애매하게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다. 이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한 에드워즈의 『원죄론』이나, 에드워즈의 설교들에서 드러난 원죄 교리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살피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대로 행위자의 경향성이 그저 원죄에만 머물러 있으면 신학적 비관주의적인 태도에만 그치게 된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동시에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조명하심을 이야기한다. 원죄에 물든 경향성에 빛을 비추어서 그 방향성을 새롭게 하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말하며, 이것은 경건한 정서로서 행위자에게 드러난다. 두 번째로 연구해야 할 방향은 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의 정도(degree)에 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서 바뀌어진 경향성의 방향은 바뀐 순간부터 영원히 지속되는가, 혹은 일회성인가?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경향성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가? 죄에서 아예 멀리 떨어뜨려 놓을 정도로 바꿀 수 있는가, 아니면 이것을 동기로 인간이 습관을 형성해야만 하는가?

마지막으로 다음의 논문이 지향해야 할 부분으로는 에드워즈의 도덕적 필연성과 일반적 필연성의 구분에 대한 정리이다. 스톰즈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외부의 외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동한 행위는 일반성 필연성이라 명명하며, 그 행위에 대한 내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그것을 도덕적 필연성이라 명명하였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정의에 의하여, 앞선 두 가지의 정의들을 재 정의하는 것이 3부의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V. 참고문헌

 

1차 문헌

Jonathan Edwards.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1, Freedom of the will, Ed. Paul Ramse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7)

Jonathan Edwards.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2, Religious Affections, Ed. John E. Smith.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9)

Jonathan Edwards.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13, The "Miscellanies": (Entry Nos. a-z, aa-zz, 1-500) Ed. Thomas A. Schaf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4)

2차 문헌

Conrad Cherry. The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 a reappraisal. (Indiana University Press, 1990)

David Laurence. "Jonathan edwards, John Locke, and the canon of experience", Early American Literature, Vol. 15 Issue 2. (1980)

Sam Storms. "The will: Fettered yet free", Ed. John piper, Justin Taylor, A God-entranced vision of all things : the legacy of Jonathan Edwards. (Illinois, Crossway books, 2004)

Sang Hyun Lee. The philosophical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앨런 구엘조. “의지의 자유”, 이상현 편저, 이용중 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웹 페이지

Kenneth P. Minkema, A CHRONOLOGY OF EDWARDS’ LIFE AND WRITINGS, PDF version downloaded by Jonathan edwards online, http://edwards.yale.edu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