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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감정 개념 연구 - 종교론과 신앙감정론을 중심으로

by 노목 2020. 8. 18.

슐라이어마허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감정에 관련된 개념 연구

―『종교론』과 『신앙 감정론』을 중심으로

the Study of Concept Related 'Emotion' in Schleiermacher and Jonathan Edwards

― Focusing on the On Religion and Religious Affection

 

 

 

◀ 국 문 초 록 ▶

 

본 논문은 슐라이어마허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감정과 관련해서 사용한 개념들을 비교함으로 내재적 신학의 올바른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목적을 가진다. 

슐라이어마허는 형이상학과 도덕이 차지했던 종교의 영역을 직관과 감정으로 재정의했다. 그는 종교를 인간이 우주, 즉 신을 직관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로 인해 감정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슐라이어마허의 인식론적 틀에서의 인간은 수용자이다. 개별사물이 인간에게 인식을 촉발하기 때문에 인간은 우주나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인간 영혼의 구성요소를 지성과 정서로 정의한다. 에드워즈에게 지성은 이해하며 사유하는 기능이다. 정서의 주된 기능은 경향성이다. 정서는 지성의 결과물, 즉 인간이 이해한 것을 토대로 하여 인간에게 감정적 변화를 주며, 경향성을 부여한다. 이 경향성이 인간의 외면적으로 표출이 될 때 그것은 의지와 관련을 맺게 된다. 에드워즈는 이해를 토대로 하지 않는 인간의 경향적 변화를 격정이라 부른다.

슐라이어마허의 체계속에서 인식의 주체자는 외부의 사물이다. 수용자인 인간이 인식에 있어서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인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 에드워즈에 체계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인식의 수용자이다. 하지만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이해를 토대로 한 올바른 행위를 야기하며 당위성을 제공하기에 슐라이허마허의 것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슐라이어마허에게서의 감정은 절대적 권력을 지닌다. 무한자를 인식했다는 것에 대한 판단기준은 개별적 인간의 감정에 달려있다. 하지만 에드워즈에게서의 감정적 변화는 경향성을 줄 수는 있지만, 이해의 여부에 따라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

본 논문은 에드워즈의 방법론을 지향점으로 삼아 내재적 신학의 발전 가능성을 모색한다.

 

키워드 : 슐라이어마허, 조나단 에드워즈, 내재적 신학, 감정, 직관, 우주, 무한자, 정서, 격정, 경향성

 

 


 

 

I. 들어가는 말 : 교차로에 선 슐라이어마허와 조나단 에드워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는 18세기와 19세기를 살다 간 독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왕성한 저술활동과 사역으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 정력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 독일 교회의 교조주의적 움직임을 보고 문제를 발견한 첫 번째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경건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당시에 시대적으로 발현했던 철학의 방법론을 신학에 도입함으로 그 탈출구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방법론에 의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며 현대 신학으로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는다. 하지만 이 방법론의 문제점과 신학적 오류들로 말미암아 반대쪽에서는 그를 ‘기만자’, 혹은 ‘이탈자’라 부르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보다 반세기 가량 앞서 살다 간 미국의 목회자이다. 비록 그는 55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열정적인 사역을 함으로 당대의 교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우리는 신앙과 지성 모두에서 ‘균형잡힌 사람’을 이야기 할 때에 종종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야기 한다. 그 이유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에서 여실히 나타나 있다.

에드워즈는 미국의 대각성 부흥 운동의 주역이었다. 그는 휫필드와 함께 대각성 운동의 중심에서 미국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명사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대각성 운동의 불을 끄기 위해 노력한 사람 중 한명이기도 하였다. 종교적 감정이 절제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해 중심 없는 혈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부흥 운동을 절제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두 인물들은 각기 시대와 장소가 다른 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전혀 교류도 없었으며 서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이 그들을 교차로에 세운 목적은, 그들이 전혀 다른 시대적 배경과 사상적 토대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탈출구로 제시한 방법론이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에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감정(emotion)을 종교의 좌소로 보았다. 감정에 주목하여서 신의 존재를 변호하려고 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 또한 마찬가지로 정서(affection)를 신앙이 거하는 곳으로 보았다. 물론 에드워즈가 말하는 정서와 슐라이어마허가 이야기 하는 감정이 같은 성격을 띄고 있는가의 질문이 연이어서 나올 수 있겠지만, 일단은 둘 다 감정에 관련된 성격의 개념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현대까지의 전통적 논의에서 일반적으로 감정은 경험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겨져 왔다. 이 맥락에서 이 둘 또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주의적 토대에서, 그리고 낭만주의적 배경에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에드워즈는 로크의 연장선상에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각기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살며 다른 문제의식을 풀려고 노력했던 이 두 신학자는, 이제 하나의 교차로에 들어섰다. 신호가 바뀌면 이 둘이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갈 것인지, 아니면 교차하여 지나갈 것인지 앞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A. 본 연구의 목적과 현대적 의의

 

본 논문은 슐라이어마허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감정의 영역에서 어떻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가를 살펴보고, 내재적 신학의 올바른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 그 목적을 가진다.

신학사에 있어서 초월의 영역과 내재의 영역,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의 개념은 늘 상반되는 주제였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면 자연스레 내재성은 묻혀지며, 내재성을 부각시키면 초월성은 감퇴된다. 내재성을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의 연속성을 강조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개별자 개개인의 개별적 체험 또한 부각되어 파편화된 신학을 맞이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초월성을 강조하게 되면 어떠한 체계성 아래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함으로 신학의 파편화는 막을 수 있지만, 하나님과 개별자 개개인의 연속성은 파기되고 만다. 이러한 초월과 내재의 대립은 신학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영향을 미쳐왔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성자 논쟁도 성자 예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견해의 대립에서 불거진 문제이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쟁도 하나님의 섭리로 대표되는 초월성의 영역을 어디까지로 한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일축할 수 있다.

이러한 대립들은 여러 시대를 거쳐 19세기에 와서는 내재적 신학의 급부상을 이끌어 냈다. 하나님을 인간의 밖에서 찾기보다는 인간의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내재적 신학을 부상시킨 인물로는 칸트(Immanuel Kant)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그리고 슐라이어마허와 리츨(Albrecht Ritschl)등이 있다. 칸트는 하나님을 인간의 도덕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헤겔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리츨은 인간의 문화에서, 그리고 본 논문에서 다룰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감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속성의 강조가 이끌어내는 많은 단점들 때문에, 이후의 신학적 노선은 다시 초월성의 강조로 이어진다. 이 작업은 칼 바르트(Karl Barth)와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등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현재의 신학도 여전히 이러한 대립 구도 속에 있다. 본 논문이 내재적 신학의 한 줄기에 대한 연구를 선택한 이유의 일면은 내재성의 강조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세계적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하나의 부흥운동인 ‘신 사도주의(New Apostle Reformation Movement)’ 와 같은 운동은 철저하게 내재성의 신학이다. 성경보다 개별자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신 사도주의의 권위자가 세운 현대적 신 사도들의 예언은 그들 내에서 성경보다 더 월등한 권위로 받아들여진다. 비단 신 사도주의뿐만 아니라, 기성 교회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은혜’라는 단어는 어느새 공동체가 아닌 ‘개별자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서술하는 용도로 변질되고 말았다. 내재성의 단점인 신학의 파편화, 즉 기준의 상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은혜롭다’는 것의 기준은 이미 개별 성도에게로 넘어갔다. 무엇이 은혜스럽고 무엇이 은혜스럽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고 본 논문은 그 해결책으로 초월성만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본 논문이 내재적 신학의 한 줄기에 대한 연구를 선택한 이유의 반대쪽 일면은 현대 한국 기독교, 특히 장로교의 교조적 성향을 배제하기 위함의 목적이 있다. 루터가 카톨릭으로부터 꺼내온 ‘개별자와 대면하는 하나님’을 다시 교리화 시키고 고착화시켜버린 정통주의와 같이, 한국 장로교의 신학도 어느새 개별자 모두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교조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신학임에도 불구하고 교리화된 그것에 묶여서 지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각 개별자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면, 기독교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기에 본 논문은 내재적 신학 중 경험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감정의 부분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B. 본 논문의 연구 방법

 

본 논문의 본론 부분은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2장에서는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에 관련된 개념들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먼저 그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 알아본 후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론』에서 사용한 논증 방식의 탐구를 통해 ‘감정’ 개념을 어떻게 도출하는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3장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다루는 정서의 개념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먼저 그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및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정서’개념을 도출하기 위해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토대로 『신앙 감정론』에서 정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4장에서는 슐라이어마허와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교함으로 두 신학자들의 감정 개념 이해의 장단점을 알아보며 내재적 신학의 현대적 발전 지향점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II. 슐라이어마허의 ‘감정’ 개념 연구

A. 슐라이어마허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딜타이가 슐라이어마허의 전기를 시작하면서 쓴 “칸트의 철학은 그의 생애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없이도 이해될 수 있지만, 슐라이어마허의 중요성과 그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의 전기가 필요하다” 라는 글귀는 후대의 슐라이어마허연구가들에게 무척이나 많이 인용된 글귀중 하나이다. 딜타이의 이 언급은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향적 성향을 띄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음을 통해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적 토대를 알아보도록 하자.

 

 

1. 슐라이어마허의 생애

 

슐라이어마허는 1768년 11월 21일, 독일 브레슬라우의 목회자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할레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796년부터 샤리테병원의 설교자로서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목회활동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철학과 문학에 대한 공부를 하였으며 슐레겔과 같은 낭만주의자들과의 교제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종교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1802년에 슈톨프의 궁중설교자로 청빙받았으며 얼마 되지 않아 할레대학의 교수로 청빙받게 되었다.

1807년에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는 저술을 통하여 베를린 대학의 창립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베를린대학이 문을 열자 신학과 교수의 직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그는 삼위일체교회의 설교자와 왕립 학술원의 철학분과위원의 직무를 맡게 된다. 그는 삼중 직임을 맡으며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며, 1821년에는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칭송을 받게 되는 『개신교 교회의 원리에 따라서 체계적으로 서술한 기독교 신앙』(책의 제목이 너무 길기에 ‘기독교 신앙’, 또는 ‘신앙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을 출판하였다. 이후로 그는 계속해서 저술활동을 하며 여러 직임을 맡아 활동하다가 폐렴을 얻어 1834년 2월 2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적 배경

 

슐라이어마허는 어렸을 때에 경건주의적인 전통을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인 고트리프 슐라이어마허(Gottlieb)는 개혁교회의 목회자였지만 모라비안의 경건주의에 동조하여 그의 가정을 경건주의적인 신앙을 가지도록 인도하였다. 고트리프는 슐라이어마허가 어렸을 때에 니스키의 모라비안 신학교에 들어가도록 독려하였고, 슐라이어마허는 이 당시에 철저하게 모라비안 교도가 되었다. 모라비안은 교리를 배우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공동체였다. 슐라이어마허 연구가인 마르틴 레데커는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하는 직관과 감정에 대한 부분이 경건주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슐라이어마허가 직관과 감정을 중시한 사상체계를 가지게 된 이유는 낭만주의의 영향도 크다. 낭만주의는 당시의 근대정신, 즉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사상체계로서 근대주의가 희석시킨 인간성을 직관과 감성을 통해 살리고자 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샤리테병원의 설교자로 있던 시절에 슐레겔을 비롯한 낭만파의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낭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와 스피노자,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 슐라이어마허는 모라비안 신학교 재학시절, 학교 당국이 철학서적에 대한 독서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미래 형이상학에 대한 서론』을 읽을 정도로 철학서적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그는 할레에서 공부할 때에 에베하르트(J. A. Eberhart) 교수의 영향을 받아 칸트철학에 대해 배우며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슈투벤라우쉬(S. Stubenrauch)교수에게서 스피노자의 『범신론 논쟁』에 대한 영향도 받았다. 또한 그가 슐레겔과의 공동번역으로 시작해서 자신만의 작업으로 마친 플라톤의 대화편 번역본은 아직까지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슐라이어마허가 칸트에게서 영향을 받은 부분은 신 인식론의 영역이었다. 칸트에 따르면 순수이성은 감각적 경험의 영역에만 제한되므로, 감각적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인식될 수 없다. 인간의 주관 밖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질 수 없다는 칸트의 입장은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를 실천철학에 의해 규정하도록 만들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슐라이어마허에게 섭리론과 신론에 관한 부분에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슐라이어마허는 스피노자의 결정주의와 같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자유를 쟁취 할것을 천명하였다. 또한 당시의 사조였던 신과 인간을 극단적으로 분리하는 초월성의 신학에 대항하여 스피노자가 주장한 동일성의 원리와 유사한 종류의 내재적 신학을 주장하였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영향은 슐라이어마허가 나중에 플라톤의 저작을 번역하면서 받은 영향으로 만유재신론적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B. 『종교론』에서 나타난 논증방식 탐구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론』을 학술적인 목적을 위해 작성하지 않았다. 『종교론』에는 많은 시적 표현이 있으며, 목창균은 『종교론』을 낭만주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문학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종교론』은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반발로 나온 저작으로써, 무조건적으로 종교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변증서이다. 슐라이어마허를 친구이자 적이라고 표현한 바르트가 그를 기독교적 전통에 입각한 변증가로 평가한 것은 주목할만 하다.

 

 

1. 선입견의 제거

 

슐라이어마허가 그의 논증에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칸트는 종교를 형이상학의 자리에서는 벗어나게끔 하였지만, 대신 종교에 도덕의 자리를 부여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종교관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러한 계몽주의적 종교관에 대한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많은 방법을 동원해서 종교를 증명하려고 노력했으며,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모델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칸트는 이를 부정한다. 종교란 학(學)적인 형이상학의 위치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 칸트는 종교에게(정확하게는 신에게) 도덕의 뿌리라는 왕관을 씌운다. 도덕성의 근간을 종교에게로 소급해서 찾고있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에게서 받은 영향대로 종교에게서 형이상학을 제거한다. 그러나 칸트가 주장한 ‘도덕으로서의 종교’도 거부한다.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는 도덕과 형이상학과는 다른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지주의와 도덕주의에 대립하여 종교를 인간의 직관과 감정이라고 주장하는 독창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여기서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사유는 형이상학을 의미하며, 행위는 도덕을 의미한다.

 

“종교는 그 본질이 형성하는 모든 것에서 뿐 아니라 그 작용이 특징짓는 모든 것에서 형이상학 및 도덕과 대립한다.”

 

물론 형이상학과 도덕은 종교가 다루는 것과 동일한 대상인 ‘우주와 이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와 형이상학과 도덕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형이상학은 우주를 분류하여 각기 본질을 따라 구분하고, 존재하는 것의 근거를 추구하며, 현실적인 것의 필연성을 연역하는 것이다. 이것의 방법은 논리이며 연역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성적인 추리와 연역으로 본질과 진리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도덕은 인간 본성으로부터 의무적 체계를 발전시키고 무제약적인 힘으로 그것을 제약하거나 행위하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는 이러한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종교가 도덕적인 행위와 동일시 될 수 없는 이유는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건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의미하는 것은 도덕이 의미하는 것과 다르기에, 종교는 도덕이 아니다.

 

 

2. 슐라이어마허의 “우주”개념

 

앞에서 살펴보았듯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직관과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직관하며, 무엇에 대해 감정의 변화를 겪어야 하는가? 슐라이어마허는 “우주”를 직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주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슐라이어마허가 사용한 “우주”의 개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레데커는 슐라이어마허의 우주를 굳이 이해하자면 희랍어의 kosmos 정도로 이해하는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의 우주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저작들을 통해서 이해해야만 하는데, 슐라이어마허는 “우주”라는 단어를 차용하면서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더 추가하였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론』에서 “우주”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같은 의미로 사용한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무한자”, “전체”, “세계”, “세계정신”, “신성”, “영원한 사랑”, “운명”, “인간성의 진수”. 이렇게 다양한 개념들에서 공통된 부분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지만, 일단 우리가 우주라는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주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는 시간성과 공간성은 슐라이어마허에게서는 배제되어 있다. 레데커는 슐라이어마허가 낭만주의자들에게서 받은 영향중 하나는 무한성과 불변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특수한 것은 전체의 일부분이며, 한정된 모든 것은 무한한 것의 표시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그가 『종교론』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제까지의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다. 이러한 입장들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모호하게 우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의 종교를 본질적으로 스피노자적, 낭만주의적, 무신론적 혹은 범신론적 신학이라고 비판한다. 반면에 딜타이를 비롯한 슐라이어마허의 옹호자들은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론』의 마지막 강연이나, 이후에 저술한 『기독교 신앙』에서 밝히는 입장을 주목하였다. 따라서 그가 계몽주의적 자연종교와 초자연주의적 기독교를 비판했을지라도 기독교를 이슬람교나 유대교보다 우월한 종교이거나, 절대적 종교라고 주장했다고 본다. 바르트또한 슐라이어마허가 기독교를 상대적으로 가장 탁월하고 가장 고상하며 가장 순수한 종교라고 이해했다고 보았다.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다음의 언급으로 『종교론』의 최종 목적을 밝히는 것을 볼 때, 아마 후자의 주장에 더 무게가 실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러분을 육화된 신에게로 안내하려는 것이다.

 

 

3. 슐라이어마허의 ‘직관’에 대한 이해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직관이라고 말하며,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주의 직관이 나의 모든 ‘종교론’의 축이며, 종교의 가장 보편적이며 지상적인 양식이다. 그것으로부터 종교에서의 모든 위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종교의 본질과 한계가 명확하게 규정된다.

 

직관의 사전적 의미는 ‘판단, 추론등을 개재시키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이것은 판단과 추론, 즉 이성의 영역을 배제시킨 경험의 영역이다. 매킨토쉬는 직관을 ‘마음에 부딪치는 객체를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직접적인 경험으로 보았다. 타이스는 직관이란 뜻의 독일어 anschauung과 영어의 insight/ intuituion 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insight와 intuition은 주관적인 자아의 경험을 의미하는 반면, anschauung은 객관적인 인식의 종류를 의미한다고 밝힌다.

 

모든 직관은 직관되는 존재가 직관하는 존재에 끼치는 영향으로부터 출발하며, 직관하는 존재의 본성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종합되며 파악되는, 직관되는 존재의 근원적이고 독립적인 행위로부터 출발한다.

 

슐라이어마허의 직관은 주체자를 사물로 놓고 있다. 인식자와 사물이 있을 때에 사물이 인식자에게 끼치는 영향이 인식자로 하여금 인식하게끔 만드는 작용이 슐라이어마허의 직관이다. 그는 실례로 우리의 촉각에 대해 예를 든다.

 

물체의 가장 작은 부분이 여러분의 손가락 끝을 기계적으로나 화학적으로 자극하지 않았다면, 무게의 압력이 여러분의 힘의 저항과 한계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도 직관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직관은 사물자체의 본성이 아닌, 인식자에 대한 사물의 행위이다. 

직관에 대해서 설명한 슐라이어마허는 이어서 종교를 이와 같다고 설명한다. 우리의 감각직관이 인식자에 대한 사물의 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직관은 우리에 대한 우주의 행동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종교도 이와 같다. ……. 우주가 산출하는 모든 형식, 삶의 충만에 따라 각별하게 현존하는 모든 존재자들, 우주가 그 충만하고 늘 풍성한 품에서 쏟아내는 모든 사건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우주의 행위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직관을 항상 직접적인 지각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복합개념은 이미 감각의 작업이 아닌, 사유의 작업인 것이다. 즉 종교는 우주의 존재와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곧 개개의 직관과 감정에서 성립한다.

이어서 슐라이어마허는 우주에 대한 직관의 탁월성을 설명한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를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무한자와 대화나 얼굴을 맞대어 볼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무한자가 끊임없는 활동 가운데 있으며 매 순간 인간에게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종교를 통한 직관이며, 이로 인해 유한한 인간일지라도 무한자를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4.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에 대한 이해

 

슐라이어마허는 직관에 대해서 설명한 후, 직관의 장소로 주제를 옮겨간다. 그는 직관이 일어나는 장소가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본질은 직관과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종교의 보편적 형상을 완성하기 위해서 모든 직관은 그 본성상 감정과 결합되어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유한자인 인간의 내면에 우주가 자신을 계시하는 행위는, 감정과 관계한다고 보았다. 그는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느낌과 취향이라고도 표현한다. 따라서 인간은 우주를 직관하는 동안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감정이란 무엇일까. 감정의 사전적 정의는 ‘개인이 자신의 경험에 의해 주관적으로 반응하는 전체적인 요소’이다. 슐라이어마허의 경우에는 인식자가 사물의 반응에 대해 직관한(된)것이 만들어 내는 요소이다. 목창균은 슐라이어마허가 감정을 “우주의 직접적인 영향”, “직접적인 자기 의식”등의 말로 표현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감정은 직관의 성격과 마찬가지로 인식자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닌, 우주에 의해서 의존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슐라이어마허는 일반적인 감정과 종교적 감정을 대비시킨다. 그는 일반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외부적 대상, 즉 사물이지만 종교적 감정을 유발하는 대상은 전혀 다른 원천, 곧 무한자에게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인식자가 사물에 대해서 어떤 자극을 받아 기쁨을 느낄 때와 무한자에 의한 종교적인 기쁨을 느낄 때는 전혀 다른 것이며, 후자가 더 우위에 있다.

 

 


 

III.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서’ 개념 연구

A.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

1.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미국의 코네티컷주 원저 팜스에서 11남매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티모디 에드워즈는 당시 청교도 목회자였으며 어머니인 에스더 스토다드 또한 당대에 유명한 사역자인 솔로몬 스토다드의 딸이었다. 에드워즈의 가정은 에드워즈가 어렸을 때에 사랑을 부어주는 동시에 신앙과 학업의 훈련을 엄격하게 시켰다.

에드워즈는 1716년, 13살의 나이로 예일대학교에 입학하여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1720년에 학사를 마친 후 그는 계속해서 공부하여 1723년에 신학 석사까지 취득하였다. 그는 학업을 마친 후, 여러 교회에서 청빙 제의를 받았지만 아직 더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학교에 더 머무르기 원했다. 때마침 모교에서 강사로 청빙을 받게 되어 21세의 나이에 예일대학의 강사로 2년 동안 있었다.

이후 그는 1727년,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는 노스햄튼 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교회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2년 후에 외조부가 별세하자 26세의 나이에 담임목사가 되어 23년동안 목회를 하였다. 이 기간동안 노스햄튼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되며, 1740년에 방문한 휫필드 목사와 함께 대각성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본 논문에서 주목하고 있는 저서인 『신앙감정론』은 1746년에 쓰여진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만찬 문제로 인해 교인들과 반목하여 1750년에 노스햄튼 교회를 사임하였다. 이후 그는 스탁브리지의 인디언을 위한 작은 교회에서 사역했으며, 이 교회는 에드워즈에게 최소한의 일을 맡겼기에 보다 그는 이 시기에 더 많은 시간을 연구와 저술활동에 몰두하였다.

에드워즈는 1757년에 프린스톤대학의 전신인 뉴저지대학(New Jersey College)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이유로 들어 거절하다 1758년 1월에 취임하였으나 2개월이 채 못되어서 천연두 백신의 부작용으로 사망하였다.

 

 

2.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적 배경과 저술 동기

a. 저술 동기와 시대적 배경

 

조나단 에드워즈가 『감정론』을 저술하게 된 목적은 『감정론』의 저자 서문에서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에드워즈는 먼저 신자와 비신자들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류에게 매우 중요하며, 모든 개인이 확실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문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구별해 주는 특징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에드워즈의 당대에는 부흥의 현상이 많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1733년부터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스햄튼 교회에서도 부흥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 젊은이들이 각성되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교회 안과 밖의 많은 이들이 종교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지며 구원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이런 영적 흐름은 지속되고 사람들에게 전염되어서 1735년에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되기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 영적 흐름에 동참하게 된 사람들은 은혜를 깨달아서 구원에 감사하며 즐거워 하였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놀라운 감정적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펄쩍펄쩍 뛰기도 하였으며 큰 소리로 울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은혜의 물결은 비단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적 변화를 얻음으로 마치 ‘완전한 성화자’가 된 것인양 행위의 제약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회심은 하였지만 감정적 변화를 누리지 못하였기에 아쉬워하며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태나 상황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감정론』을 저술함으로 온전한 성도의 정의를 내리고자 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참된 종교를 분명하게 분별하고, 참된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해결하고 그것을 확립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b. 철학적 배경

 

에드워즈는 철학사적으로는 로크의 영향을 받았다. 스테펜은 에드워즈가 로크(John Locke) 의 개념들을 다수 차용하여서 자신의 신학을 설명하려 했다고 밝힌다. 로크는 인간의 본질을 영혼의 기능들에서 찾았다. 영혼의 기능의 전통적인 분류는 지성과 감정, 의지로 나누는 것이지만 로크는 그것을 오성과 성향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에드워즈는 로크의 이 개념을 차용해서 자신의 사상을 설명한다.

에드워즈는 비단 이 두 개념만 로크에게서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이경직은 에드워즈가 로크의 인식론적 틀의 전반적인 부분들을 모두 이용해서 자신의 신학을 설명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인간의 관념이 모두 감각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로크에게서 받아들이며, 공간이 하나님의 감각 기관이라는 사실을 뉴턴에게서 받아들인다. 이 개념은 버클리(Jeorge Berkeley)의 인식론과 비슷하다. 에드워즈가 로크의 인식론을 차용하여서 하나님 개념을 추론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순수한 무(無, nothing)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존재가 없었던 때는 없다. 따라서 존재는 영원하며, 모든 곳에 있다. 그런데 공간이 없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공간은 영원히 존재하며, 결국 신적이다. 그런데 로크의 인식론에 따르면, 존재는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존재하려면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에 매 순간 매달려야 한다. 따라서 영적인 것만 실체가 된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물질적 사물이 들어있는 공간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여겼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와 같다. 이러한 백지 상태의 마음에 외부의 자극이 흔적을 남긴다. 인간의 감각은 수동적이기에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변형 또는 왜곡시킬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있는 흔적은 외부의 자극을 당연히 반영하게 된다. 에드워즈도 이러한 구조를 토대로 종교적 앎에 대해 주장한다. 에드워즈가 올바른 정서에 대해서 언급할 때, 참된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인을 치시고 당신의 형상을 새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A. 『신앙감정론』에서 나타난 논증방식 탐구

1.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간이해

 

에드워즈는 『감정론』에서 매우 체계적으로 자신의 개념들을 확립했고 그것을 사용해서 치밀한 논증을 선보인다. 에드워즈가 『감정론』에서 말하는 ‘정서’에 대한 개념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의 유(類) 개념들부터 하나씩 체계화 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번 장에서는 에드워즈의 논증을 역순으로 따라가서 가장 상위의 개념부터 알아 볼 것이다.

 

 

a.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혼-육체의 모델

 

우리는 모든 문제를 말하기 전에, 에드워즈가 인간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에드워즈가 자신의 논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개념들은 모두 인간의 속성과 관련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가 가능한 개별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를 따로 뗄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이 둘이 제시한 영혼-육체의 모델을 기독교의 교리에 맞추어 혼합 및 보완한 인간론을 제시했다. 영혼과 육체는 따로 떼어서 사유할 수 있는 대상이기는 하지만, 죽음으로 인하여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영혼은 육체와 붙어있으며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이 둘은 죽음이라는 단계를 거쳐서 일시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난다.

에드워즈 또한 이 모델을 수용함으로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기독교 인간론과 다르지 않은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에드워즈는 “우리 감정의 거처는 육체가 아니라 오직 정신”이라고 말하여서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여서 사유한다. 그러나 다음에서 볼 수 있듯 이 둘은 긴밀하게 연결됨으로 서로 상호간에 영향을 주는 무엇이다.

 

우리의 본성과 영혼과 육체의 연합 법칙 때문에 우리 영혼의 의지나 성향의 생생하고 왕성한 활동은 반드시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느 정도 체액이나 특히 본능(animal sprits)을 움직인다. 또 한 편으로는 영혼과 육체의 연합 법칙 때문에 몸의 구성요소와 체액의 움직임이 감정의 활동을 촉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적인 행동을 명령하는 의지의 작용과 신체 기관들의 움직임이 별개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과 몸이 연합되어 있는 한, 그 양자가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변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b.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혼의 구성요소

 

에드워즈는 영혼의 기능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전통적으로 인간 영혼은 이성(mind)과 감정(emotion), 의지(will)의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본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전통적 구분을 사용해서 자신의 새로운 구분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한 가지는 지성(understanding)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과 사유, 판단을 담당한다. 다른 한 가지는 명확한 이름이 없다. 인간이 인식하거나 지각한 사물에게 인간 자신이 끌리거나, 역으로 싫어하게 되는 기능이다. 이것을 에드워즈는 성향(inclin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정서(affection)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에드워즈의 새로운 분류중, 전자의 것은 전통적 분류에서의 이성과 같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후자의 것이다. 책의 제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 후자의 개념을 설명하는 주된 단어는 정서(affection)이다. 에드워즈는 정서에 대한 논증을 진행하면서 마음(heart)이라고도 설명한다. 페리에 따르면, 정서와 마음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뉘앙스의 공통점 때문에 혹자들은 에드워즈의 이 개념을 감정(emotion)과도 같은 것으로서 지성(head)과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간주하기도 하였다. 또한 ‘affection’의 뉘앙스를 정확하게 전달해주는 번역어의 부재로 특별히 한국에서는 이러한 오해가 더 커졌다고 보여진다.

 

 

2.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서 개념에 대해서

a. 경향성을 지닌 정서

 

에드워즈는 정서를 감정과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정서는 감정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의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앞에서 보았듯 에드워즈는 인간 영혼의 기능을 지성과 정서의 두 가지로 나눈다. 에드워즈는 정서와 성향을 동의어로 보았다. 정서란 성향이라는 단어의 뜻에서 찾아볼 수 있듯 지성의 결과물, 즉 인간이 이해한 것을 토대로 하여 인간의 마음에 경향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정서는 경향성의 충분조건이기는 하지만 필요조건은 아니다. 경향성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 이것이 느낄 수 있도록 활력있게 작용할 때에만 정서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정서는) 인간의 영혼이 무관심하게 사물을 바라보기만 하지 않게끔 하며, 그것에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기뻐하거나 싫어하거나, 또는 인정하거나 거절하는 감정이 개입되게 하는 기능이다.

 

이 기능은 인간 영혼에 긍정성과 부정성의 두 가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 전자는 인간 영혼이 인식한 사물들을 인정하고 기뻐하며 애착을 가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을 의미하며, 후자는 그 반대의 경우, 즉 싫어하고 반감을 가지며 거절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을 의미한다. 전자의 예로는 사랑, 갈망, 희망, 기쁨, 감사, 만족과 같은 것들이 있으며 후자의 예로는 미움, 두려움, 분노, 슬픔과 같은 것들이 있다.

페리는 에드워즈의 정서 개념에 대해 전통적인 인간 영혼의 세 가지 구분 중 감정을 포괄하며, 그렇다고 지성과 의지 모두와 구별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정서가 지성이 이해한 것과 관계하여 내적인 경향성을 발현할 때 그것을 마음(heart)이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에드워즈의 서술에서 ‘정서’와 ‘마음’, ‘성향’은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된다.

또한 에드워즈는 정서의 내적 경향성이 그것의 실체적 실현을 이룬 상황을 전통적 인간 영혼의 기능 중 의지(will)의 작용에 대입시켜서 설명한다. 에드워즈는 “의지와 정서는 서로 분리된 기능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정서와 지성의 연관성이다. 정서는 지성으로 이해한 것을 토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정서는 성향이 지성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정서는 지성의 생각들과 필연적인 관계에 있으며, 일반적으로 의지의 탓으로 돌려지는 행위의 원천이다.

 

정서와 지성의 이러한 연관은, 에드워즈가 『신앙론』에서 격정(passion)과 정서를 대비시키며 정서를 더 부각시키는 이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b. 정서와 격정의 구분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에드워즈가 『감정론』을 저술한 목적은, 당시의 열광적 부흥주의와 지성에 근거한 체험적 신앙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에드워즈는 정서와 격정의 개념을 구분함으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격정은 “육적인 욕정에 미치는 영향이 더 격렬한” 성향이다. 본능에 미치는 효과가 더 갑작스럽고 격렬하기에 지성으로 통제가 불가능하다. 반면에 정서는 선택 작용이 가능하도록 명석한 이해와 충분한 자아 통제력을 동반하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둘로 나눈 영혼의 구성요소는 지성과 정서였다. 여기서 정서는 사실 지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해를 동반한 감정적 경향성이 정서인 것이다. 격정은 전통적인 인간영혼의 세 가지 기능에 속하는 감정(emotion)과 더 유사성을 보인다. 지성적 이해가 없이 감정만 고양되는 것이 격정이다.

 

 

c. 올바른 정서의 정의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의 기초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주된 정서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감정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성경(마 22:47-50, 롬 13:8, 10, 갈 5:14, 딤전 1:5 등)에서 증언하는 바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인간의 영혼이 가지는 자애로운 경향성’이다. 이런 영혼의 경향성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활력 있게 작용하면 인간에게 일종의 정서를 이루게 되며, 이것은 바로 감정적 사랑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냥 인간이 본래부터 지닌 속성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인간의 원죄를 인정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날 때부터 죄된 존재이다. 죄된 존재인 인간이 날 때부터 온전한 정서를 가질 수는 없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이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은 외부의 물체가 인간의 감각에게 흔적을 남겨서 생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드워즈도 인간의 올바른 정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인을 치시고 자신의 형상을 새기심으로 생겨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올바른 정서는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이다.

 

 


 

 

IV. 나가는 말

 

감정이라는 교차로에 서 있던 슐라이어마허와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호가 바뀌자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논의를 인식자의 인식 수동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그리고 인식의 범위를 감정으로 국한시키는 방향으로 진행시켰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인식자의 인식 수동성과 함께 행위의 능동성 또한 주장하기 위하여 그의 논의를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인식의 범위를 이성에만 그치지 않고 감정에 기초한 이성과 의지 모두라고 주장한다.

 

 

1. 인식의 수동성과 능동성

 

슐라이어마허의 체계 속에서 인식자는 직관을 통해 외부의 사물을 감각한다. 직관의 여러 단계들 중에서 주체자는 인식자 개인이 아니라 외부의 개별 사물들이다. 개별 사물들이 인식자에게 ‘감각되어 주기’ 때문에, 인식자는 개별 사물들을 직관할 수 있다. 이른바, 물체가 인식자에게 ‘만져지기’ 때문에 인식자는 물체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종교적 직관 또한 마찬가지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우주, 즉 무한자가 인식자에게 자기 자신이 있음을 알리기 때문에 인간은 무한자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유한자는 그 유한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여도 무한자를 감각할 수 없다. 그러나 무한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유한자에게 직관되도록 영향을 끼친다. 주체자가 외부의 사물이었던 일반 감각에서의 모델과 같이, 종교적 직관의 체계에서도 주체자는 여전히 무한자이다. 즉 인식자는 영원히 직관의 부분에 있어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인식자는 마치 어린 새들이 어미 새가 먹이를 주는 것을 기다리듯이 주변의 사물들이 직관되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에드워즈의 모델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체자는 외부의 사물이다. 로크의 백지설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정당화하는 에드워즈에게서도 ‘백지 상태의 인간’에게 흔적을 남기는 것은 외부의 사물이다. 이 구조는 종교적 영역에서도 같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인을 치시고 당신의 형상을 새겨놓으셨기에, 이것에 대한 반영이 올바른 정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어떠한 자발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서가 지성이 이해한 것과 관계하여 수동적인 감각을 가질 때는 내적인 경향성 이 정립된 것이다. 이것이 행동과 관계될 때 에드워즈는 ‘의지'라는 다른 이름을 명명한다. 올바른 정서는 그것이 인간 안에서 내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멈춰서는 안된다. 반드시 올바른 행위와 연관되어야만 올바른 정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의지와 성향의 차이는 행위자의 주체성에 있다. 성향이 생기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인치시는 작용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수동적으로 성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행위와 관련이 될 때에는 주체자는 인간이 된다. 야고보서에서 인간의 행위가 믿음의 근거가 되듯, 에드워즈의 체계에서도 인간의 행위는 올바른 정서의 당연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슐라이어마허의 체계는 신자들이 수동성에서 벗어날 동기를 마련해 주지 못한다. 신자가 되고 말고의 문제는 무한자가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슐라이어마허의 체계에서는 전도의 필요성도 약화되며, 경건한 삶을 위한 신자의 노력 또한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체계에서의 행위적 주체성은 다시 인간에게로 넘어왔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와 인치심에 대한 인간의 수동성은 당연한 것이며 성경적인 귀결이다. 하지만 에드워즈의 이 체계는 인간의 당연한 행위, 즉 올바른 정서에서의 올바른 의지의 사용까지도 제약적인 부분으로 몰아넣게 된다. 따라서 신자들은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할 당위성을 이 체계에서 취득하게 되는 것이다.

 

 

2. 감정과 관련된 개념에 대한 차이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은 말 그대로 인간의 감정, 즉 지성과 의지와 대비되는 성질의 것이다. 전통적인 인간 영혼의 기능에서의 감정과 같은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감정은 종교의 좌소이다. 종교적 직관에 의하여서 생긴 종교적 감정으로 우리는 무한자를 인식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감정을 배제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서’의 개념은 지성과 의지와 대비되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와 감정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정서’는 그냥 감정적 변화만을 말하지 않는다. 지성으로 이해한 것을 토대로 생긴 감정적 변화와 함께 행위의 제약까지 이끌어 내는 모든 일련의 과정이 바로 ‘정서’인 것이다. 그렇기에 에드워즈의 정서에서 ‘감정’의 영역이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랑한다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위치는 그렇게 중요치 않다.

슐라이어마허의 이 모델은 하나님을 너무 감정에만 국한시킴으로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일반적 직관과 종교적 직관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그리고, 직관에서 감정이 나온다는 명제에서 감정이 직관의 필요조건일 수 있는가의 문제도 있다. 감정이 직관에게서만 나오는가? 이 문제는 위조된 감정을 만들 수 있을 가능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현대적으로 이 문제를 해석한다면, 잘 만들어진 분위기에 의해서 위조된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종교적 감정을 가졌기에 무한자를 인식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정서’에 대한 다른 정의를 내림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했다. 에드워즈는 감정에서 시작한 논증으로 정서의 개념을 도출하였지만, 에드워즈의 정서에서 감정의 위상은 높지 않다. 에드워즈의 정서는 이해와 함께 주어진 감정이다. 이것은 경향성이며 인간을 움직이게끔 하는 원동력이다. 에드워즈의 정서 개념에 의한다면 감정의 변화만으로 하나님을 인식했다는 망상을 피할 수 있게 된다.

 

 

V.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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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대사전』(서울: 동녘, 2002)

 

 

◀ ABSTRACT ▶

 

In order to attain a purpose to suggest proper direction of the development of immanent theology, this thesis compares the notions of Schleiermacher and Jonathan Edwards concerning the 'emotion'.

Schleiermacher re-defined the domain of religion which was dominated by metaphysics and morality as a domain belongs to intuition and emotion. He thought that the religion is human being's intuition for the universe which is God and this religion brings forth the emotions. In the epistemological framework of Schleiermacher, man is always receiver. Since individual objects affect man to have perceptions, man can recognize the universe or the individual objects.

Before starting his discussion, Jonathan Edwards defines the elements of human soul as 'understanding' and 'affection'. In his thoughts, 'understanding' means the function of thinking and comprehension. The main function of 'affection' is the 'inclination'. Affection gives emotional change and inclinations to man based on the results of understanding. When this inclination is expressed outwardly, it comes to be related with human will. Edwards calls the changes of inclination which is not based on the understanding as 'passion'.

In Schleiermacher's thoughts, the subject of perception is the external objects. Man cannot choose what to do in perception as receiver. Likewise, in Edwards' thoughts, man is also the receiver of perception. However, as Edwards' model essentially brings forth the proper behaviors based on the understanding which gives the model legitimacy, it has some distinctive quality from Schleiermacher's. In Schleiermacher's thought, emotion has absolute authority. The standard of judgment in the perception of the Infinite One depends on the individual person's emotion. In contrast, though emotional change can give us some inclination, the reasonableness of that emotion is decided by the understanding in Edwards' thought. 

This thesis makes the thoughts of Jonathan Edwards as its goal, and tries to find out some possibilities for the development of the immanent theology.

 

Keywords : Schleiermacher, Jonathan Edwards, immanent theology, emotion, intuition, Universe, Unlimited One, affection, passion, incl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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