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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배달부/옛날에 쓴 글들 + 잡동사니

성화상논쟁과 개혁주의: 본질과 아디아포라의 문제와 관련하여

by 노목 2020. 8. 17.

Johannes von Damaskus 다메섹의 성 요한 Ⓒ en wikipedia

 

I. 들어가는 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두가 인정 가능한 규준이 없는 포스트모던에서는 이러한 잣대를 제시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기준 아래에서 통일적인 가치를 좇는 공동체라면 그 기준으로 인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지만, 현 시대는 그렇지 않다. 또한 그렇다 할지라도 해석적 차이라는 이름 앞에서 판단의 갈피를 잃어버리고 말게 된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실 많은 힘을 잃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양한 가치체계 아래에서 다양하게 발생하는 여러 상황들의 시시비비를 가리다가 사실상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무엇을 부여잡아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본 논문은 중세에 벌어졌던 성화상논쟁[1]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봄으로 본질과 아디아포라의 영역에 대해 알아보려 하는 목적을 가진다. 중세의 수도원운동에서부터 시작된 이 작은 불씨는 국가 통수권자의 개입과 공의회의 출범이라는 큰 화재를 벌인 채 종식되었다. 여기서 발생한 신학적 논쟁의 쟁점은 하나의 기독론을 통해 성상옹호론자들과 반대론자들이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며 싸웠다는 것이다[2]. 단순한 신학적 논쟁은 결국 많은 사람을 죽게 하는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아디아포라를 지키기 위해 본질을 희생한 셈이 되고 만 것이다.

 

동방교회를 둘러싸고 8세기와 9세기 가량에 발생한 성상논쟁은 초대교회 교부들로부터 전수받은 관습에 근거한 부분이 상당수 많다. 따라서 본 논문은 먼저 2장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간략한 이해를 가질 것이다. 

이어진 3장에서는 비잔틴시대에 발생한 1, 2차 성상파괴령[3]과 관련된 역사적 흐름을 알아볼 것이다. 거의 한 세기에 걸쳐 발생한 본 논쟁은 많은 논쟁 끝에 성상옹호론자의 승리가 선언됨으로 종식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4장에서는 개혁주의 이후의 학자들이 가진 성상 이해를 간략하게 알아봄으로 중세의 성상논쟁이 가진 의미에 대해 평가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II. 초기 기독교의 성상에 대한 이해

 

성상이란 성스러운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이 지상에 현재화시키는 특별한 표현 수단을 의미한다[4]. 이 성상을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이콘(eikon)이라 불렀다. 얀 브레머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당시에 성상이란 말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로 사용되었던 에이돌론(eidolon), 아갈마(agalma), 그리고 에이콘이라는 세 가지의 단어 중에서 에이콘을 선택하여 사용하였다[5]. 에이돌론은 유령이나 비실재라는 말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실제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가시적 표현인 성상을 표현하기 위해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아갈마는 그리스나 로마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의 신상에 쓰는 말이었기 때문에 불경건해보인다는 이유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그리스어 사전에 따르면, eikon은 닮음, () 또는 초상을 의미[6]하는데, 브레머는 당시 그리스나 로마의 사람들이 살아있는 자신의 통치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상()을 말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밝힌다[7]. 그렇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상()을 말하기 위해 그렇게 불경하지도 않으며, 살아계심을 표현하는데에 적합한 단어로 에이콘을 선택하였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예술은 3세기경에, 로마의 석관부조와 초기 기독교식 지하묘지 회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전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기독교 예술이 발견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의 전통에 의거하여 경배의 대상을 표현하는 것을 금하였다고 본다[8]. 그러나 혹자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영적인 성향을 띄며, 재림을 소망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의 물질을 사용한 기독교적 예술이란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 하지만 이를 다르게 해석하는 부류는, 이미 초기 기독교는 1세기 말 정도에 다른 종교나 집단과는 구분되는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자신의 신앙을 물질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반(토지나 자산)이 없었기에 아무런 예술적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다[10]. 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3세기 이전에는 기독교적 전통에서 나온 아무런 예술 작품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3세기경부터 갑자기 기독교 예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로는 로마의 박해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이 카타콤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으로 들 수 있다. 박해와 거듭 일어난 기독교인의 순교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소망을 찾기를 원했다. 그래서 기독교적 상징을 그려넣은 형태의 석관을 마련하는 등의 장례문화에 대한 변혁이 이루어졌다. 로마에서 발견된 최초의 기독교 예술에서는 일반적으로 로마의 이방적인 상징 대신에 비둘기, 고기, , 닻과 같은 상징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구약과 신약의 사건들을 표현한 그림들을 찾아볼 수 있다[11]. 이 당시의 그림들 중에서 절반 이상이 요나의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제는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는 구원에 관련된 대부분의 주제에 대한 그림이 사라졌다. 이것에 대하여 서원모는 박해나 기근, 법적 차별, 죽음의 위협등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구원에 관련된 주제를 선호하게 하였다는 평가를 내린다[12].

이와 같은 일반 신자들의 움직임속에서 많은 초대교회 교부들은 성상을 부정하는 측면에 서 있었다. 3세기의 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는 두 가지의 측면으로 성상을 부정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영이기에 물질로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한 몸이기에 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13]. 유세비우스 또한 그리스도 형상의 본성중 인성을 제외한 신성은 물질로서 표현될 수 없다는 논리로 성상을 반대했다[14]. 4세기의 어거스틴 또한 그림이나 조형물을 만드는 것과 그리스도를 베드로와 바울과 함께 묘사하는 그림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15].

그러나 그 중에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진리의 전달 수단으로 설교와 성상을 함께 긍정했었던 교부들이 있었다[16]. 카이사레아의 바실레이오스는 황제의 조각상으로 인해 황제의 능력이 분열되거나 조각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들어 성상을 긍정했으며[17] 교황 그레고리 1세 또한 성상이 문맹자들에게 하나님을 이해시키는것을 돕는다는 이유로 성상을 긍정하였다[18]. 이런 종류의 지지와 함께 성상숭배의 사회적 흐름은 동 · 서방에 걸쳐 점차로 활성화되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이후, 많은 교회당들이 건축되면서 다양한 예술적 작품들이 교회당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III.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논쟁

 

1.  1차 성상파괴령

6세기 말에 들어서 비잔틴에서는 기독교 예술에 대한 이해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성상을 성인들의 도움을 매개하는 것 이상으로, 성상 자체에 힘과 능력이 있으며 그에게 합당한 존경을 바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에까지 이르렀다[19]. 사람들은 성상을 마치 부적과도 같이 미신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626년 콘스탄티노플이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에게 포위당했을 때에 총대주교는 그리스도 성화상을 들고 성벽을 돌았으며, 727년 아랍에 의해 니케아가 포위되었을 때에도 기독교인들은 제1차 공의회에 참여한 318명의 주교들을 그린 성화상들을 들고 행진했다[20]. 이러한 흐름은 성상논쟁을 촉발하는 촉매가 되었다.

720년경부터 레오 3세를 중심으로 비잔틴에서는 성상에 대한 대대적인 반란운동이 일어났다. 717년에 즉위한 레오3세는 726, 크레타 북동쪽의 산토린 섬과 테라시아 섬 사이에 발생한 화산폭발을 하나님의 진노로 해석해 대대적인 성상파괴령을 내렸다[21]. 그리고 이를 반대했던 총대주교를 교체했다. 이전의 논쟁들은 소규모로 특정한 인물과 장소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반면에, 이 시기에 일어났던 성상논쟁은 국가적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레오 3세가 성상 파괴령을 내렸던 이유는 확실치 않다. 이후의 논쟁에서 실권을 잡은 성상 옹호파들이 성상파괴자들의 문서들을 파괴하여서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성상파괴자들의 저작들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그 원인을 파헤치려고 노력했지만 이에 대한 아직까지의 정설은 없다[22]. 하지만 그것의 표면적인 이유로는 신학적인 이해의 다름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레오 3세와 그의 옹호파들은 모세의 십계명중 제2계명인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근거로서 사용하였다. 이들은 피조물을 창조주 대신 경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성화상에게 능력이 있다고 믿거나, 기적을 기대하는 행위를 우상숭배 행위라고 정죄하였다. 성상파괴론자들과 성상옹호론자들의 신학적 차이는 기독론에서 드러난다. 성상파괴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분리될 수 없으며 신성은 가시적으로 표현될 수 없기에, 그리스도를 성화상에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의 상징은 성찬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3].

반대로 당시의 대표적인 성상옹호론자였던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750,「성상파괴를 반대하는 변증[24]」을 저술하여 이러한 성상파괴자들의 기독론을 반대한다. 요한은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재현(eikon)이며,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재현(eikon)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5].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물질로서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 또한 물질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26], 인간의 시대를 두 가지로 구분하며 성상을 옹호한다. 이전에, 모세가 출애굽할 당시에는 사람들의 신앙이 마치 젖을 먹는 아이들과 같아서( 5:13) 우상숭배를 하려는 경향이 있었기에 성상을 금지하였지만, 지금은 장성한 사람들과 같아서 성상을 우상으로 섬기며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상이 표현하는 대상을 숭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27]. 또한 그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와 성인이나 성상을 숭배할 때의 단어를 구분한다[28].

그러나 레오 3세의 아들로서, 740년에 황제로 즉위한 콘스탄틴 5세의 치하에서 다시금 성상파괴자들이 힘을 얻게 된다. 콘스탄틴 5세는 754, 주교들을 자신의 히에리아(Hieria) 왕궁으로 소집하여 공의회를 열었고 여기서 다시 성상숭배는 우상숭배로 금지되며, 성상을 숭배했던 수도승들과 일반 시민들은 주적으로 몰려 처벌을 받게 되었다[29]. 이것과 관련된 문서에는 이 공의회가 제 7차 공의회라는 언급이 보이지만[30], 사실 이 공의회는 황제가 성상 파괴자들만 소집한 것으로서 예루살렘의 요한은 우두머리가 없는 종교회의라고 비판하였다[31].

775년에 콘스탄틴 5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 아이렌은 아들인 콘스탄틴 6세를 왕좌에 앉혀서 섭정을 하였다. 이 치하에서 787,  7차 공의회인 2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고 성상옹호론자들이 극적인 승리를 거두어 다시 제국은 성상숭배의 분위기로 돌아가게 되었다[32]. 이때부터 다시 그리스도와 마리아, 천사, 성인들의 성상이나 성화상에 존경을 표하거나 묵상을 하는 것이 허용되기 시작하였다[33].

 

2.  2차 성상파괴령

이런 분위기 속에서 레오 5세가 집권하자 다시 성상파괴자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 이유로는 성상파괴의 손을 들어주는 수도승들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것이며[34] 다른 이유로는 레오 5세가 성상파괴를 옹호했던 황제의 정치 방식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도 들 수 있다[35]. 레오 5세는 815년에 다시 성상파괴파들의 공의회를 열었다. 여기에서는 787년의 공의회를 무효라고 선언하며 754년의 히에리아 공의회를 제 7차 공의회로 인정하였다[36]. 이 공의회의 특징은 이전같이 완벽하게 성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결의한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걸려있는 성상만을 파괴하도록 하였고 높은 곳에 걸려있는 성상들은 그대로 보존하기로 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지한 사람들이 성상에 입을 맞추며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으며 높은 곳에 걸려있는 성상은 문자를 대신하는 용도로 사용되기 위함이었다[37].

그러나 레오 5세와 미카엘 2세의 뒤를 이은 테오필로스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가 미카엘 3세를 대신하여 섭정하며 843년에 다시 성상을 옹호하는 것으로 성상논쟁의 불씨는 사그라들기 시작하였다.

 

 

 

IV. 종교개혁 이후의 관점

 

1. 칼슈타트의 관점

칼슈타트는 종교개혁자로 손꼽히는 사람들 중 최초로 로마 카톨릭을 우상적이라고 공격한 사람이다. 칼슈타트는 성상을 우상과 동일시하여서 카톨릭의 성상숭배의 전통을 비난하며 나섰다. 

칼슈타트는 당시의 카톨릭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유로 구약성서의 율법을 약화시키는 것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기에 우리가 살인, 도둑질등을 엄히 지킨다면, 십계명의 형상금지또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38]. 또한 그는 성상숭배를 통해 당시의 카톨릭은 교권을 강화해 왔다고 주장했다.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만들어졌던 성상의 최초의 의미에서 벗어나, 이제는 성상 자체가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고 성서에게서 신자들을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카톨릭 교회가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39]. 마지막으로 칼슈타트는 물질적 요소가 영적 은혜를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하며 카톨릭의 외적인 예식을 반대하였다. 이것은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무익하다는 성경말씀을 기초하여 형성되어진 그의 영 · 육의 이원론에 의한 것이다[40].

 

2. 루터의 관점

루터는 처음에 성상에 대한 문제를 아디아포라의 영역으로 생각하였다[41]. 루터가 생각하는 성상은 그것이 숭배되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성상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루터는 먼저 우상을 외적인 우상과 내적인 우상으로 구분하고,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는 전제에서 그의 논의를 펼친다. 성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숭배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상이 아닌 것이다[42].

루터가 보기에는 사람들은 성상파괴론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성상 자체를 하나님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터가 지적했던 부분은 다른 영역의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사람들은 성상을 잘못 사용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성상을 숭배하기 위해 돈을 지불함으로 하나님께 공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서 돈을 낭비하곤 했다. 루터는 이것을 비판하며 성상을 막무가내로 파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적 신앙을 소거해야 한다고 말했다[43].

그러면서 루터는 성상을 교육적인 목적으로 긍정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성경에 쓰여진 단어들이 시각적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성경의 메시지를 읽거나 들을 때 이미 마음속에 상을 만들어 놓게 되는데, 성상은 이것의 확대적 표현의 일부이다[44]. 또한 루터는 성상 자체는 구원을 가져다 줄 수는 없지만, 성경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을 돕는 촉매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45].

 

3. 칼빈의 관점

칼빈은 칼슈타트와 마찬가지로 성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46].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으로 경배되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근본적인 입장이다[47]. 칼빈은 『기독교강요』와 『십계명에 대한 주석』에서 그의 성상관에 대해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1 11장에서 성상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의 두 가지를 모두 비판하고 나선다. 첫 번째는 성상으로 인해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성상 그 자체[48]이다. 칼빈은 루터가 구분한 외적인 형상과 내적인 형상의 구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에게는 신적인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에,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은 자연스럽게 우상숭배의 길로서 빠져들며, 그 결과로 우상의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49].

이어서 칼빈은 모세에게 하나님은 형상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성상을 부정하며, 사도행전 17:29과 같이 물질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쓰여진 성경의 본문들을 들어 근거로 삼는다[50]. 이어서 그는 세네카와 교회의 교부들의 말을 원용하여 성상을 부정하며[51] 그레고리 1세와 그 여하의 성상옹호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나선다[52]. 이후로 제 2차 니케아 공의회를 성경이 오용된 예로서 들며, 경배나 존경등의 모든 언어적 다름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린다[53].

또한 칼빈은 하나님이 만들게끔 지시한 성막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반론도 차례대로 논증하여 제거해낸다. 칼빈은 하나님이 지시한 성막을 영적인 은사의 탁월성을 유비하는 형태의 것으로 보았다[54]. 각각의 성막의 모든 형상들은 그림자인 이 세상을 대표하여 영적인 세계를 사모하게끔 하는 방편일 뿐이었다[55].

 

4. 현대 기독교 미학자의 관점

토론토의 ICS에서 기독교 미학을 가르치는 아드리엔 채플린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을 해석학적으로 분석한다[56]. 그의 논의를 따라가보면, 고대로부터 많은 논란을 가져왔던 중심에는 출애굽기 20:4의 히브리어 페셀(pesel)[57]이 있었다. 이 단어는 상반된 뜻으로 사용되어 성상옹호론자나 반대론자 모두에게 원용되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로 모든 영어성경에서 두 가지의 상반된 표현으로 나타난다[58].

따라서 이 해결책으로, 채플린은 맥락(context)을 따져보는 방법을 추천한다. 이는 텍스트 자체의 뜻이 아닌 맥락을 좇아가는 해석학적 방식을 수용한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기 20:3 20:5의 두 구절을 살핌으로 해결하려 하는데, 이 구절들이 모두 우상숭배를 경계하는 용도로 쓰여졌다는 것을 근거로 20:4의 페셀또한 우상을 의미한다고 본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채플린은 우상숭배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알리기 위한 교육적 용도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 등의 용도로 성상이 사용되는 것은 긍정하며, 페셀 그 자체는 아디아포라의 영역임을 주장한다.

 

 

 

V. 나가는 말

 

십계명의 2계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다행인 것은 현대에서는 본 싸움이 종식되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성상에 대한 견해는 조금씩 다르다. 칼슈타트와 칼빈은 반대하는 입장에서, 루터와 채플린은 온건한 입장에서 사용을 긍정하였다. 이를 볼 때에, 결국 성상논쟁 자체는 비본질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성상에 관련된 논쟁은 중요하다. 무지한 문맹인들이 성경도 모른채, 성화상에 능력이 있더라며 성상 자체에 대한 믿음을 키워 나가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선을 넘지 않는다면 그것을 논외로 하는 것 또한 지혜가 아닐까. 본질이 아닌 것에 힘을 뺄 필요가 있었을까. 성상논쟁으로 체력을 소진하지 않고, 그것으로 이방인 전도나 더 높은 가치가 있는 일에 힘을 쏟았으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지 생각해 본다.

 

 

 

VI. 참고문헌

 

Bremmer, Jan N. Iconoclast, Iconoclastic, and Iconoclasm. Church History and Religious Culture,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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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of Damascus, Trans. Mary H. Allies. On Holy Images.  London: Thomas Baker, 1898.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한국대학선교학회, 대학과 선교 12, 2007.

오유석, 「성화상 논쟁과 동방 정교회의 미학, 신앙과 학문, 11 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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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차규, 「레오 3세와 성상파괴 논쟁, 명지사론, 1999.

김차규, 「콘스탄티누스 5세와 성상파괴 논쟁, 서양중세사연구, 1999, 10.

김산춘,「제 2차 비잔틴 이코노클라즘과 동방신학, 미학 예술학 연구, 2004.

최재호, 「비텐베르크 운동과 성상파괴주의, 역사교육 94, 2005.

칼빈, ., 원광연 역. 『기독교강요 상.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7)

칼빈, ., 존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 『구약성경주석』.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0)

 


[1] 성상논쟁, 혹은 성화상논쟁이라고 불리우는 본 논쟁은 726년부터 842년까지 비잔틴 시대에 그리스도나 성인들의 미술작품을 두고 교회 내에서 벌어진 논쟁을 가리킨다. 주된 입장으로 교회 내에 성상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의 성상파괴론자(iconoclast)들과 교회 내에 성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의 성상옹호론자(Iconodule)들이 있었다. Stephen Gero, Byzantine Iconoclasm and the Failure of a Medieval Reformation, Ed., Joseph Gutmann, The image and the Word : Confrontations in Judaism, Christianity and Islam, Montana : Scholars Press, 1977, 49-50.

[2] William A. Dyrness, Reformed Theology and Visual Culture, New York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23.

[3] 성상파괴주의라는 뜻을 가진 ‘iconoclasm’은 라틴의 iconoclasmus라는 단어의 번역된 형태로서, 16세기에 처음 출현했다. 정식으로는 윌리암 테일러가 자신의 저서, French Revolution(1797)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성상을 반대했다는 맥락으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 단어가 8세기의 비잔틴 성상논쟁을 가리키는 맥락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973년에 와서이다. Jan N. Bremmer, Iconoclast, Iconoclastic, and Iconoclasm, Church History and Religious Culture, 2008, 88, 13.

[4]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한국대학선교학회, 대학과 선교 12, 2007, 2.

[5] Jan N. Bremmer, "Iconoclast, Iconoclastic, and Iconoclasm", 2.

[6] Henry George Liddell, Robert Scott, An Intermediate Greek-English Lexicon, Internet ver.

참조 :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text:1999.04.0058:entry%3Dei)kw/n,

Accessed : 2013. 4. 25

[7] Jan N. Bremmer, Iconoclast, Iconoclastic, and Iconoclasm, 3.

[8] 오유석, 「성화상 논쟁과 동방 정교회의 미학」, 신앙과 학문, 11 2, 2006, 75.

[9] 서원모, 「기독교 예술과 성화상 논쟁」, 교육교회, 2009, 21.

[10] 서원모, 「기독교 예술과 성화상 논쟁」, 21.

[11]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302.

[12] 서원모, 「기독교 예술과 성화상 논쟁」, 21.

[13] 김차규, 「레오 3세와 성상파괴 논쟁」, 명지사론, 1999, 111.

[14]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302.

[15]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302.

[16] 오유석, 「성화상 논쟁과 동방 정교회의 미학」, 76.

[17] 오유석, 「성화상 논쟁과 동방 정교회의 미학」, 76-77.

[18] William A. Dyrness, Reformed Theology and Visual Culture, 21.

[19]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303.

[20] 서원모, 「기독교 예술과 성화상 논쟁」, 23.

[21] 김차규, 「레오 3세와 성상파괴 논쟁」, 129.

[22] 레오 3세의 성상파괴령에 대해 장신대의 서원모는 이슬람의 기독교 국가 침략과 승리를 그 이유로 든다. 7세기 말부터 반기독교 정책을 폈던 이슬람은 721년에는 자체적으로 기독교 예술을 파괴하라는 칙령을 선포하였다. 이슬람은 쿠란의 문자를 제외한 모든 형상을 우상숭배로 부정하는 전통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승리가 비잔틴 제국의 신앙에 대해서 자각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서원모, 「기독교 예술과 성화상 논쟁」p. 24. 반대로 김차규는 군사, 재정, 행정적 개혁을 위해서 레오 3세가 성상문제를 부각시켰다는 평가를 한다. 김차규, 「레오 3세와 성상파괴 논쟁」, 137.

[23] 서원모, 「기독교 예술과 성화상 논쟁」, 24.

[24] 750, 다마스커스의 요한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근거로 하여 성상을 긍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한 글. 윌리엄 디어니스는 자신의 저술에서 요한의 이 서적이 동방 교회의 기독론의 큰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고 설명한다. William A. Dyrness, Reformed Theology and Visual Culture, 22.

[25] John of Damascus, On Holy Images. Trans. Mary H. Allies. London: Thomas Baker, 1898, I. 9, 10, 16

[26] John of Damascus, I. 6.

[27] John of Damascus, I. 7, 8

[28] John of Damascus, I. 13, 14. 하나님 자체에 대한 예배로 표현되는 latreia와 하나님의 은혜와 활동에 대한 경배, 공경, 숭배, 존경등으로 표현되는 proskuinesis, time의 단어를 구분하는 것은 당시 다른 성상옹호론자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서원모, 「기독교 예술과 성화상 논쟁」, 24.

[29] 김차규, 「콘스탄티누스 5세와 성상파괴 논쟁」, 서양중세사연구, 1999, 10.

[30] 김차규, 「콘스탄티누스 5세와 성상파괴 논쟁」 11.

[31] 김차규, 「콘스탄티누스 5세와 성상파괴 논쟁」 11.

[32] William A. Dyrness, Reformed Theology and Visual Culture, 22.

[33]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305.

[34]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305.

[35] 김산춘,「제 2차 비잔틴 이코노클라즘과 동방신학」, 미학 예술학 연구, 2004, 3.

[36] 김산춘,「제 2차 비잔틴 이코노클라즘과 동방신학」 4.

[37] 김산춘,「제 2차 비잔틴 이코노클라즘과 동방신학」 4.

[38] 최재호, 「비텐베르크 운동과 성상파괴주의」, 역사교육 94, 2005, 123

[39] 최재호, 「비텐베르크 운동과 성상파괴주의」, 124.

[40] 최재호, 「비텐베르크 운동과 성상파괴주의」, 120.

[41] 루터가 성상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들은 루터를 젊은 루터 ‘1525년 이후의 루터로 나누어서, 그가 성상을 부정적으로 보았다가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이와는 달리 루터가 초기에 성상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성상숭배의 남용만을 부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최재호, 「비텐베르크 운동과 성상파괴주의」, 127.

[42]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307.

[43]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309.

[44]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310.

[45]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311.

[46] 하지만 이것에 대한 견해 또한 학자들마다 제각각이다. 혹자들은 칼빈을 완벽한 성상파괴론자로 생각하였다. Christopher Richard Joby, Calvinism and the arts, Dudley, Mass. : Peeters, 2007, 28.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칼빈이 성상을 파괴하기 위하여 이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개혁을 하기 위하여 성상 파괴를 주장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에 의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성상의 문제는 그저 아디아포라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William A. Dyrness, Reformed Theology and Visual Culture, 50.

[47]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상』, 원광연 역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7), 221.

[48] Christopher Richard Joby, Calvinism and the arts, 5.

[49]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상』, 231.

[50]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상』, 221, 227.

[51]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상』, 228.

[52] 칼빈은 그레고리가 주장한 성상이 무지한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가르치는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주장까지도 완벽하게 부정한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상』, 229-231, 237, 239.

[53]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상』, 241, 245.

[54]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존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0), 138, 139.

[55] 존 칼빈,『구약성경주석』, 141.

[56] Adrienne Dengerink Chaplin, Visual Spirituality, Christian today, May 2006, 58.

[57] pesel의 어근은 pasal로써, 이 단어는 나무나 돌을 깎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Adrienne Dengerink Chaplin, Visual Spirituality, 58.

[58] 이것은 KJV RSV와 같은 류의 번역본에서는 새긴 상(graven image)”이라고 번역되었으며 NIV NRSV와 같은 종류의 번역본에서는 이것을 우상(idol)”이라고 번역되었다. Adrienne Dengerink Chaplin, Visual Spirituality,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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