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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배달부/창세기 묵상 나눔

창세기 4장 8-16절 :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by 노목 2020. 8. 17.

Photo by Wesley Tingey on Unsplash

 

 

 

사역을 하던 시절,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기뻐 춤을 추며 나를 맞아주었다. 작은 소자로부터 받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행복했었을진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그보다 얼마나 더 귀한 것일까?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땅에 거주하더니

 

 

 

1. 죄인에게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

 

비록 커다란 죄를 지은 가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인격을 짓밟는 방식으로 그를 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먼저 가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범죄의 사실을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다. (1) 하나님 당신께서 그 범죄의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으며 (2) 가인의 대답을 통하여 범죄 사실에 대한 가인의 시인을 듣고 싶으셨을 터이다.

가인이 이 질문을 듣고서 곧바로 마음을 고쳐 먹었으면 죄값이 작아졌을까? 성경이 그것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함부로 그것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가인에게 손을 내밀고 계시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의 시초로부터 지금까지 죄인에게 손을 내미시는 분이시다.

 

 

2.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

 

성경은 아벨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다. 아마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차원의 일과 독자인 우리들의 일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의 피해자를 아예 외면하고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다음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가인의 범죄를 드러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피해자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죄악을 밝히시는 정의로운 판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현재의 삶에도 우리를 둘러싼 많은 악들이 존재한다. 인간이 가진 죄악들이 여전히 잔존하여 있고, 이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때문에 발생한 악의 피해자들을 외면하여 버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시고, 그들을 변호하시며, 그들을 해한 이들을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1) 가인의 직업은 농부였다. 그는 농사하는 자로써 땅에게서 소산을 얻는 자였다. 그러한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벌은 꽤나 혹독한 것이었을 것이다. 땅으로 먹고 사는 자가, 더 이상 땅을 통하여 효력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소유와 획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땅의 것을 움켜쥐려 하였던 인생이 결국 땅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2) 물론 이 형벌은 그에게 있어서는 나름대로 혹독한 것이었을테지만, 우리는 무언가 적절한 형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타인의 죽음을 야기한 자의 말로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석가는 가인에게 주어진 이 형벌이 생각보다 온건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가인이 회개하였을 것이라는 이론을 내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수는 없다. 그리고 쫓겨난 이후의 삶을 볼 때에도 가인이 회개하였다는 이론은 쉽게 납득되기 힘들다. 이후에 등장하는 가인의 계보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이 외면되고 있으며, 셋의 아들이 나왔을 때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3) 가인의 죄를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서, 우리는 자비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려두셨으며, 가인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자 그의 목숨을 살리는 표를 주기도 하셨다.

그에게 땅의 소산을 취하지 못하게 하시면서도 그를 계속 살려두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가 손에 쥐려 하였던 것들을 치우시며,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의 삶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가인이 다시금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4) 어제의 묵상에서 찾아볼 수 있듯, 범죄한 가인의 눈에는 자신의 생명의 무게만이 중하게 여겨졌다. 그는 하나님의 낯을 뵈옵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정신없이 도망갔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이 지명 “놋”은 유리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앞을 떠난 이들이 향하는 곳은 유리하고 방황하는 곳이다. 소산을 손에 쥐려고 열심히 달려가도, 허무한 인생은 그것을 손에 쥘 수 없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는 그 시점에 인생을 계수하시는 심판관을 조용히 만날 뿐이다.

인생들이 방황하고 유리하는 그 곳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목자가 없어 고생하며 기진한 영혼들을 향하여 오셨고, 아낌없이 스스로를 내어주셨다. 이것이 범죄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4. 적용과 결론

 

  • 억울함을 아시고 변론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자.

아마도 가인의 귓가에는 아벨의 억울함을 아시고 그의 피값을 물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쟁쟁하였을 것이다. 설령 어려운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영원하고 공정한 심판관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 여전히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자.

죄악의 값에 두려워하는 자가 있는가?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마주하며 여전히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자가 있다면, 다시 당신께 돌아오기를 바라며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품이 그곳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놋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은혜와 죄의 양면성

가인에게는 표가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표는 가인이 죽임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생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표는 가인의 죄를 공표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가 살인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표식이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 죄가 드러나야 그것이 은혜로 작용한다. 은혜를 기억하기 위하여, 나의 죄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나의 생명이 침탈당하지 않음을 기억하며, 죄인인 내가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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