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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배달부/창세기 묵상 나눔

창세기 4장 16-24절 : 놋, 유리하는 자의 땅에서

by 노목 2020. 8. 17.

Photo by Ali Inay on Unsplash

 

 

 

족보를 본다는 것은 꽤나 지루한 작업이다.

어렸을 때 나의 집에는 족보책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가운데 내 본관의 이름은 없었다. 해방과 전란을 거치며 발생한 행정적 실수로 아버지와 나는 한글로 된 유일무이한(?) 본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이것을 설명해주시며 나의 뿌리에 대해 이야기해주시곤 하셨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성경에서도 많은 부분에서 족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문화와 삶의 형태에 대한 뿌리를 말하고자 함일 것이다. 많은 탁월한 학자들이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성경은 당대에 쓰여진 다른 고대근동문서들과 확연히 다른 차이점을 보인다. 이 대목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 있다. 신적인 존재의 개입을 통해 자신들의 문화권을 옹호하려는 신화적인 움직임들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1. 누구의 이름이 높아져야 하는가?

 

이후로 기록된 유일한 가인의 행적은, 자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쌓은 것이다. 여호와의 앞을 떠나 황급히 유리하는 땅으로 도망친 가인의 인생은 고작 유한한 인생의 이름 하나를 높인 것이다. 여호와의 앞을 떠난 사람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영광을 유한한 누군가를 위해 돌리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고래로부터 현재까지 이 법칙은 동일하게 모든 인생에게 적용된다. 헛된 것을 높이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자리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2. 10명의 계보

 

본 장에 등장한 10명은 필시 가인의 후손들 가운데 기록된 모든 이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1) 아담으로부터 셋을 거쳐 노아에 이르는 족보 또한 10명이 등장하며, (2) 10은 히브리민족의 완전성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숫자였다. (3) 또한 창세기의 많은 본문들은 말씀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가인과 아벨의 형제들이 동시대에 존재했음을 말하기 떄문이다.

가인으로부터 출생한 10명의 후손들은 각각의 문화적 영역에 대한 창발자의 역할을 한다. 어떤 주석가의 해석에 따르면, 에녹으로부터 국가의 제도가 시작되었다. 라멕의 네 자손들은 목축업과 음악, 철기문화(병장기),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나아마)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문화의 발전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유리하는 자의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론에서 이야기한 바, 다른 고대근동의 문서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선하고 신적인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과 상당히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3. 수직적 족보와 수평적 족보의 분기점, 라멕

 

존슨의 연구에 따르면, 창세기의 족보들은 시간의 연속성을 제시하는 수직적 족보와 개별적인 가계를 공통의 조상들까지 추적해들어가는 수평적 족보로 나뉜다. 그리고 그 분기점에 해당하는 인물은 대부분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1) 가인보다 흉포해진 악의 옹호자

23절에 나온 사람과 소년이 동일인물인지 개별적인 존재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라멕은 자신의 살인사건을 옹호하거나 자신의 위세를 떨쳐 보이기 위하여 시를 지어 아내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살인의 본성은 대를 거듭하며 이렇게 강성해져 갔다.

유의해 볼 점은, 여기에서도 라멕은 살인에 대한 핑계를 대고 있다는 것이다. 상처를 받고 상했다는 그 사실은 살인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라멕과 같은 본성이 역시 우리에게도 숨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타인에게서 상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가? 라멕에게서 유래한 이 본성을 끊어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2) 구약성경은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일부다처제의 형식으로 가정을 꾸려왔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구약이 일부다처제를 승인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명확하게 일부다처제의 기원이 가인의 계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일부다처제는 인간을 지으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4. 적용과 결론

 

  •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무리 허울좋은 핑계로 포장한다 할지라도, 결국에 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는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혹은, 이 땅의 그릇된 문화만을 좇고 살아가고 있다면, 역시도 이것이 유리하는 자들이 택한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최종적인 목적을 위해 선용될 수 있는 도구이지, 최종적인 추구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최종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항상 직시해 보아야 한다.

 

  • 죄악에 대한 핑계를 대고 있지는 않는가?

라멕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듯, 죄는 계속해서 강성해져가고 잔인해져 감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작은 죄를 허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죄를 지으며 이것에 대한 합리화, 즉 핑계를 대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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