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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배달부/창세기 묵상 나눔

창세기 5장 6-32절 : 거룩한 삶, 그러나 여전히 수고로운

by 노목 2020. 8. 18.

Photo by Amir Hanna on Unsplash

 

아! 너무나도 생각할 것들이 많다.

어떻게 일상적인 삶 속에서 거룩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여전히 더럽고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1. 셋의 계보가 이야기하는 것은?

 

가인의 후손들은 이 땅에 문화들을 가져오는 역할을 한 것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기자는 셋의 후손들을 가인의 계보보다 더 길고 자세한 방법으로 소개하면서도 그들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전혀 문화적인 업적을 남기지 않아서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의 숫자가 많지 않았을 이 시절에 문화적인 어떠한 것을 만들어 내거나 이용할 능력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노아만 하여도 나무를 잘 다루는 자였으며, 자신의 아들들과 방주를 만들 정도의 기술자였지 않았는가!

성경의 기자는 하나님을 좇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문화와 아디아포라적인 영역들을 창시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듯 하다. 우리도 동시대의 문명을 누리고 살아가며, 그러한 문화들 중의 어떠한 것들을 창시하거나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셋의 후손은 자녀를 낳고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찬송을 잊지 않았고(마할랄렐),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신자도 있었으며(에녹), 고통하는 세대를 위해 안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기도 하였다(노아).

 

 

2. 거룩과 세속의 구분점

 

에녹에 대한 성경 기록은 특기할만하다.

(1) 그는 10대의 선택적 기록들 가운데에서 7번째에 배치되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가장 귀한 신자들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장치이다.

(2) 그는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그것과 자녀를 낳는것을 병렬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고대의 문맥에서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성경은 인류 최초의 역사를 기록하면서도 세속과 거룩을 일반적인 관점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 곳곳과, 특별히 바울과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거룩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에녹의 삶을 평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녀를 낳는 것 또한 하나님과 동행함 안에서 거룩한 영역으로 여겨주셨다.

(3) 얼마나 살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36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을 살았던 에녹이지만, 그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충만하였기에, 그는 하나님과 영원토록 동행할 수 있도록 올려짐을 받았다.

 

 

3. 거룩한 삶, 그러나 여전히 수고로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 땅에서는 수고로운 삶을 살아간다. 에녹의 서술이 이것을 보여준다. 자녀를 낳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로 주어진 수고로움의 일부이기도 하였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그러한 수고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아의 부친인 라멕도 이것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그 또한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수고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수고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 가운데 부여잡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이며(에녹), 하나님의 안위가 아닌가(노아)? 이것이 가인의 계보와의 커다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수고롭고,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저주와 같이 느껴진다 할지라도, 거룩한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4.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을 부여잡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나의 삶의 초점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존재인가? 하나님을 부여잡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업적은 남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익한 존재에 불과하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자.

 

  • 수고로운 인생 속, 우리의 안위는 무엇인가?

여전히 풍파가 몰아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신자가 되면 그 폭풍이 없어지거나 줄어들것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시대에 역행하는 결정을 해야 될 때도 있기에, 고통이 더 많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셋의 계보에 기록된 이들도 여전히 그러한 풍파속을 걸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며, 그것에서 안위를 누리고 완전함을 얻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우리의 참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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