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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배달부/창세기 묵상 나눔

창세기 6장 5-8절 : 그들의 제각기 다른 시선

by 노목 2020. 8. 18.

Photo by Georgy Trofimov on Unsplash

 

 

구약은 굉장히 드라마틱하다. 구약의 모든 책에서 인간의 죄악을 고발하며, 그로 인한 우울감을 여과없이 표현한다. 요새 묵상하고있는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에서도 이것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구약이 드라마틱한 이유는, 그 우울감으로 끝을 맺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죄악이 드러나며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구원의 서광이 비쳐온다. 그러니 우리는 이 놀라운 본문들을 읽으며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삶에서도 서광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을 것임을 기대할 수 있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1. 죄악을 보시는 하나님

 

아직도 본문을 읽으면 개역한글판으로 읽던 어린시절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전의 번역에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이 관영하였다”고 말한다. 가득 차고 더 차서 넘실거리는 모양이다.

1-4절에 대한 요약으로써 본문은 노아 당대의 인간 군상의 죄악에 대하여 고발한다. 거룩을 위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거룩을 버리고 아름다워 보이는 인간의 딸에게로 들어간 것이 관영한 죄악의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성읍에 의인 열명이라도 있으면 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성읍에는 의인이 단 열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라도 별 다를게 있을까? 거룩을 위하여 회심으로 성별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비그리스도인의 삶보다 나을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과 마음을 보시고 “의인이 여기 있다”고 말씀하실까?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넘실거리는 죄악을 보고 계신다.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며 인내하고 계시는 우리 주 하나님을 기억하자.

 

 

2. 한탄하시며 심판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여기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을 토대로, 하나님의 전지성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는 없다. 이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사유하는 방법을 들어 당신의 마음을 십분 표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가득찬 인류의 죄악을 보시며 한탄하시며 근심하신다.

7절의 심판 계획에서 특기할 부분은 사람만이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죄악을 지은 대상은 인간인데 왜 인간만 심판을 받지 않고 세상의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되는가?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대표성의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고 다스림의 책임을 맡기셨다. 이 대표성의 원리가 적용되기에 그리스도의 속죄 또한 효력이 있다.

 

 

3. 은혜를 입은 노아

 

(5절) 여호와께서 죄악을 보시고

  (6절) 한탄하시다

    (7절상) 지면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7절하) 한탄하시다

(8절)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자비를 보았다

 

물론 한글 성경으로 보아도 매우 드라마틱한 전개이지만, 히브리 문맥에서 또한 깔끔한 수미상관의 전개가 보인다. 본 구조에서 강조점은 7절의 심판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심에 있지만, 인간에게서 죄악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자비를 보여주셨다.

8절에 대한 해석도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에,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직역을 하자면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KJV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But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

 

죄악을 보신 하나님꼐서는 죄악을 심판할 계획만을 세우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풀 계획까지도 함께 세우셨다.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한 구속의 역사를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을 택정한 자에게 보이시는 구속의 방법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구속은 모든 이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1)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2) 그러므로 혼탁한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이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를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진리의 숨김과 나타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구속의 진리를 받아 누린 이들이며, 이것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로 이 땅에 존재해야 한다.

 

 

4. 적용과 결론

 

  • 나는 이 땅을 아름답게 하고 있는 사람인가?

솔직히, 예수님께서 당장에 재림하신다면 나의 삶의 경중을 어떻게 달아보실지 너무나도 두렵다. 죄악이 관영한 세대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것인가? 히브리서가 말하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그 능력을 발휘하며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져야 하겠다.

 

  •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 사람인가?

어제와 오늘의 본문은 세 종류의 존재가 각기 다른것을 보았다고 진술한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보시고

(8절)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자비를 보았다

 

나는 무엇을 보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눈이 향하여야 할 곳은 무엇인가? 세상의 아름다움/즐거움인가? 아니면 비난하기 위하여 세상의 죄악을 보아야 하는가? 그 가운데 숨겨진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해야 하는가?

 

(궁금증: 창세기의 이름들은 항상 문맥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언어유희적인 요소들이 많이 보인다. 가인에서도, 셋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이 많이 보인다. 노아의 경우에서도 노아라는 이름과 한탄하셨다는 말의 “나함”은 자음 구조가 같다. 나중에 더 공부할 부분으로 기록.)

 

#말씀묵상 #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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