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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배달부/창세기 묵상 나눔

창세기 6장 1-4절 : 인내하시는 하나님

by 노목 2020. 8. 18.

Photo by Kyle Johnson on Unsplash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1.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글리슨 아처가 소개하는 창세기의 대표적 난제가 바로 이 구절이다. 뜬금없이 하나님의 아들? 네피림? 이런것들이 뭔가 싶다. 옛날부터 해석해오던 방법론들을 잠깐 소개한다.

 

(1) 하나님의 아들 = 천사들

(2) 하나님의 아들 = 위정자들

(3) 하나님의 아들 = 하나님의 사람들

 

천사라고 하면 엄청난 판타지의 세계가 열린다. 위정자라고 하면 역사적 문맥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또한 맥락상 이것을 써 놓은 성경기자의 의도에 대한 궁금증이 추가로 생긴다. 그래서 아처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은 (3)의 의견을 수용한다.

 

이것은 지난 4장과 5장에 걸쳐 가인과 셋의 계보를 비교하였던 문맥과 깊은 연결성을 지니며, 그래서 노아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조금 더 나아가서 6:2는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이 결혼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주석가들도 있다.

 

  • 거룩하고 성별된 존재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의 자손들과 교류하며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내를 삼는 조건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인들이었다. 하나님께 기준을 묻지도 않고, 자신들이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악과가 인간에게 죄로 적용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와 같다. 그들 스스로가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

 

이 부분도 총체적 난국이다.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하지 아니함”, “그들의 날” 모두가 해석적 어려움을 가진다.

 

(1)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영에 대한 관점도 신학적 스펙트럼에 따라 규정하는 바가 너무나도 다르다. 짧게 요약하자면, 본 맥락에서의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구약적인 맥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이해한다면, 남아있는 구약의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임재하시는 부분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게 된다. 하나님께서 변개하셨나? 그렇게 볼 수 없다. 이것을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본다면 더욱 문제가 심화된다. 그렇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생명/은혜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함께 하지 아니함

“로 야돈”이라고 기록된 함께 하지 않겠다는 말씀도 해석에 있어 많은 어려움을 지닌다. 야돈의 어근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성경은 이것의 어근을 “싸우다”에 해당하는 것으로 예상하여, “싸우지 않겠다, 심판하지 않겠다”로 번역한다. (NIV는 이것을 “not contend with”로 표현한다.)

 

그러니 본 맥락은 “내가 언제까지 너희들을 참겠느냐? 더 이상 나의 은혜/생명으로 너희들을 보전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해석하는것이 정당해 보인다. (이후에 나오는 백이십년에 대한 해석도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혹자는 인간의 수명이 변한 것으로 보지만, 나는 노아의 홍수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기간이 120년 남은 것으로 보는게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 경건을 위해 구별된 백성들의 타락은 하나님께 큰 실망을 안겨 드렸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는 이러한 물 심판이 있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이들의 타락을 이렇게 큰 문제로 여기신다. 우리들의 삶이 거룩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지워진 채 남겨져 있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3. 네피림과 용사

 

4절에 등장하는 네피림 또한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천사나 괴물이었다는 식의 해석은 차치하고, 네피림은 당대에 존재하였던 거인의 한 부류였거나, 땅에서 이름을 날리던 지도자층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옳아보인다.

성경은 이들이 이미 땅에 있었다고 말한다. 하늘과 땅은 상반되는 개념으로 제시됨으로, 성경은 이들의 특성을 땅/육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를 바랬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어지는 용사라는 말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강하다/용맹하다/교만하다 등의 어원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이며, 이러한 특성은 가인의 계보에서 발견된다.

그러니 이들을 사람의 딸들을 대변하는 가인의 후손으로 여기는 편이 타당하게 여겨진다. 아마 라멕과 같이 자신의 이름을 드날렸던 용맹한 어떤 이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들을 숭상하여 이들과 결혼하려 하였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4. 적용과 결론

 

  • 아름다움은 질서에 대한 개념이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정위를 정할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훼손된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 일이 없어야 한다.
  • 하나님은 노아의 심판의 시절에도 유예기간을 두셨다. 이는 (1)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기다림이며, (2) 관영한 죄악에 대해서도 꾹 눌러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이기도 하다. (3) 동시에 경건한 의인이 준비되는 것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수 있다.

 

#말씀묵상 #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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