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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배달부/창세기 묵상 나눔

창세기 37장 1-17절 : 요셉의 순종

by 노목 2020. 8. 19.

 

Ford Madox Brown,  The Coat of Many Colours 

 

 

창세기는 요셉의 이야기로 마지막 족보의 역사(톨레도트)를 기록한다.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아직 완전한 성취가 일어나지 않았다. 자녀들이 많기는 하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만큼 많지는 않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작되었지만 아직 성취된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이 땅에서, 야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너무나도 우리의 삶과 동일한 이 고민 가운데, 요셉으로 퍼져가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다.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1. 야곱의 삶의 안정과 그 뒤에 찾아오는 마음의 시련

 

1절이 이야기하는 바,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다. 이삭은 거류하였고 야곱의 시대에 이르러 거주하게 된 것이다. 이 번역의 차이는 원어적인 의미상의 차이를 보인다. 이삭에게 적용된 ‘거류’라는 단어에 사용된 ‘gur מְגוּרֵי’라는 단어는 잠시 체류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야곱에게 적용된 ‘거주’의 원어는 ‘예세브 יֵּ֣שֶׁב’이다. 이것은 야곱의 삶이 조금 더 그 땅에 정착하고 안정되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에 도착했다. 요셉이 17세였으니 야곱은 108세였으며 이삭은 168세가 되었다.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거주하는 가나안이지만, 아직 하나님의 약속은 완성되지 않았다. 많은 가나안인들이 그 주변에 있었고, 자신의 백성들은 이 가나안을 점령할 만큼의 숫자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의 시대에 주변의 목자들과 우물 파는 것 때문에 다투게 되기도 하였다. 이 얼마나 시덥잖은 싸움인가!

 

그러나 성경은 야곱의 시대에 조금 더 그의 삶이 안정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안정의 시대를 거치는 야곱에게 하나의 큰 시련과 마음의 슬픔이 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고민을 버티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움직이시며 역사하신다.

 

 

2. 야곱이 보여주는 반면교사의 예

 

야곱은 라헬을 가장 사랑하였기에, 그의 아들인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였다. 요셉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다른 아들들에게는 편애로 느껴졌다. 해밀턴은 야곱이 요셉에게 준 채색옷의 번역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채색옷이라고 번역된 “케토네트 팟씸”에서의 팟씸(passim)은 원래 손바닥이나 발바닥을 뜻하는 말로써, 영어성경과 개역개정의 번역은 70인역을 따른 것이다. KJV는 좀 더 원어적인 의미에 맞게 이를 번역하여 “a long robe with sleeves”, 즉 손과 발까지 오는 긴 옷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긴 옷은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입는 옷으로 노동자층이 아닌 지도자층이 입는 옷이었다.

이어서 해밀턴은 멘덴홀(Mendenhall)의 주장을 가져와, 당시 우가릿 지방에서는 이것이 사회적 혹은 정치적 특정 상태를 준 것으로 표현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해밀턴, 408). 이 해석을 가져 온다면, 야곱은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특별한 상태, 즉 장자권은 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이 요셉에게 준 것이 단순한 채색옷이든, 장자권이든, 그것은 다른 형제들에게 시기의 감정을 낳았다. 그것을 이후 살인을 모의할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사랑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자녀들 사이에 차별하며 비교하는 것들이 그들을 아프게 한다. 부서에서 특정한 한 지체를 더 사랑하는 것 또한 성도들 사이의 반목을 낳게 되기도 한다. 사랑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3. 두 번 주어진 요셉의 꿈

 

성경은 요셉을 꿈 꾸는 사람으로 그린다. 실제로 야곱의 사랑을 받은 요셉은,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형제들과 부모님 앞에서 높아지는 것을 상징하는 두 번의 꿈을 꾸게 되었다. 송병현은 두 번의 꿈은 하나님의 의도성과 그것에 대한 계시적인 측면을 가리킨다고 이야기한다(송병현, 660). 요셉도 다음을 통해 이것을 지적한다.

 

창 41:32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요셉 이야기에서는 두 번의 꿈 이야기가 총 세 번에 걸쳐 등장하며,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사람에게 알리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다음의 표는 송병현 교수가 그것을 정리한 것이다.

 

송병현, 660

 

 

4. 고난도 하나님의 뜻이다

 

이제 요셉은 아버지의 명을 좇아 세겜에 있는 형들에게 나아간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75킬로미터의 거리가 있었다. 아버지 야곱은 17세가 된 막내아들을 형들에게로 보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야곱은 그 형제들 간의 시기와 미움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던 것일까?

 

100세가 훨씬 넘은 야곱을 생각해 볼 때에, 그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시기를 받고 있었던 17세의 요셉까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다. 사춘기의 시간, 워낙 예민해질 수 있는 기간의 요셉은 분명하게도 그 시기와 미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명에 순종하고 이것을 고백한다. “내가 그리하겠나이다”(13절) 이 고백은 그의 할아버지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했던 고백과 동일한 히브리어로 이루어져있다(22:1). 닥쳐올 고난을 예상하면서도, 요셉은 아버지의 부름에 그저 순종하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세겜에 이른 요셉은 형들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로 나아와 형들이 간 곳을 일부러 가르쳐 준다. 이 장면도 역시나 매끄럽지 못하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길을 찾는 것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요셉을 형들에게로 보내어 주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왜 이리도 힘들고 어려운 것일까? 하나님은 일부러 요셉을 고난받게 하시려 그 곳으로 보내시는 것 같다. 그러나 고난도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리는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두 번의 꿈으로 요셉을 높이실 것을 보이셨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고난이 주어지는 것이다. 받아야 할 고난이라면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그 길을 알면서도 걸어가는 것, 이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이지 않을까.

 

 

5. 적용과 결론

 

- 안정된 곳에서 고난이 찾아온다

 

우리 하나님은 안정을 싫어하시는 분이시기 떄문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안정을 주시다가도 고난을 주신다. 결국 야곱의 인생에 찾아온 요셉의 상실은, 종국에 이스라엘이 국가적인 기틀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 사랑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편애는 가정의 구성을 망치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된다. 요셉에게 주어진 사랑은 그에게는 귀중한 것이었지만, 다른 형제들에게는 화평을 깨는 불씨가 되었다. 자녀들, 성도들과 나의 주변인들을 지혜롭게 사랑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자.

 

- 고난도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다. 그것이 고난이라면,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나는 오늘 요셉처럼, “내가 그리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할 있는 용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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